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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지명

봉화문화원게시판
  등록일 : 2023-12-26 | 조회 : 417 | 추천 : 0 [전체 : 72 건] [현재 1 / 1 쪽] [로그인]
이름
봉화문화원
제목
상운면 문촌리(文村里)

※ 내용을 인용하실 때는 "출처:봉화문화원 홈페이지"를 꼭 기재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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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봉화군 서면 지역으로 글을 잘하여 글촌, 기촌 또는 문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라리 일부와 임지면 상토리 일부를 병합하여 문촌리라 해서 상운면에 편입되었
다. 2000년에 문촌 1·2리가 문촌리로 통합되었다.

문촌(文村)·기촌(杞村)·끝촌 : 상운에서 봉성으로 갈 때 가장 먼 곳에 있다고 하여‘ 끝촌’
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이 지역 주민들이 학문을 숭상하고 많은 선비를 배출하여‘ 문촌’으
로 개명하였다. 기촌으로도 불린다. 또한 이곳은 500여 년 전 문곡(文谷) 금휘(琴徽)가 골
안에서 마을을 개척해 현재까지 봉화 금씨가 동성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부채등 : 마을 뒷산이며 부채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부채등’이라 부른다. 정상 부분은 바위
로 되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산꼭대기의 바위가 험하게 생겨 마을 젊은이가 많이 죽
어서 부숴 버렸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놀이와 연날리기 장소로 이용되었다. 부채등 중간
지점에 있는 옻물탕은 한센병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환자들이 많이 와서 마을에서 개를 잡
아 물탕에 넣었는데, 그 후 효험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옻이 오르거나 피부병이 생기
면 이곳에 가서 씻으면 잘 낫는다.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 곳집 모퉁이 : 상여를 넣어두는 곳집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상여는 동래공 금휘 선
생이 충청도의 양전도경차(量田都敬差)로 있을 때 서거하자 왕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특별
히 하사한 것이다. 조각이 정교하고 예술적 가치가 높았으나 상여이므로 마을 사람들이 가
까이하는 것을 금하고 한적한 곳에 곳집을 지어 보관해 장례식에 사용하여 왔으나 1990년
6월 경에 도난당했다. 피리 부는 총각·처녀·말 탄 동자·메뚜기 등이 있었다. 곳집 앞에
옹기굴이 있었다.
• 너래바우(바위) : 동리 끝 부분에 있으며 5~6평의 평평한 바위이다.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
로 이용된다.
• 사당골 : 동래공 금휘의 사당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사당에는 임금이 하사한 곤룡포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걸인이 와서 곤룡포를 덮고 잠을 자 곤룡포를 버렸다고 한다.
• 검등골 : 사당골 입구 오른쪽 골이다. 검은 이끼가 낀 돌이 많아 붙여진 지명으로 추측된다.
1950년까지 옹기를 굽던 터가 있었다.
•달기리 : 저녁에 달이 뜨면 제일 먼저 볼 수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말무덤재 : 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이며 말무덤이 있다. 마씨 성을 가진 사람의 무덤이 있어
서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 충신각 : 임란의병 창의대장 류종개(柳宗介) 장군의 충신각이 있던 곳이다. 충신각은 안동
묘에 옮겨 세웠고 1964년에 삼기당 금시양(琴是養)의 처사각을 고지바위(고암)에서 이곳으
로 이건 하였다.
• 송실 : 종선정(種善亭) 앞 하천으로 종선정 옆에 큰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추측된다. 제일 아래쪽에 있던 소나무는 적암(赤巖) 금제순(琴悌筍, 1545~1611)이 심었다
고 하며 1950년대에 베었다. 제일 위쪽에 있던 소나무는 매년 단오 때 그네를 매던 동수(洞
守) 나무였으나 1986년 솔잎혹파리 피해로 고사하고 현재는 한 그루만 남아 있다.
• 학생못 : 대청바위 아래에 있다. 학이 살던 곳이라 하여‘ 학생못’이라 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청바위 : 널찍한 바위가 마루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곶감바위 : 안동묘에 있는 성황당 앞에 곶감 같이 생긴 바위이다.
•웃송실 : 충신각 상류 쪽이다.
• 안동묘 : 종선정 건너편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당초에는 종선정 옆 산등성이와 연결되어 있
었다. 옛날 마을에 온 승려를 주민들이 괄시하여 내보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승려가 산등
성이를 끊어 하천을 내면 동리가 잘 된다고 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그렇게 하자 학 세 마리
가 날아가고 마을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안동묘는 이때 하천을 돌리면서 생긴 조그마한 산
이 되었다. 안동묘에는 성황당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15일 자정에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1980년에 바깥 동묘에 있던 충신각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 바깥동묘 : 안동묘와 마주 보고 있는 동산이다. 모퉁이에 있던 충신각을 1960년대 초 이곳
에 건립하였으나 1980년에 안동묘로 다시 옮겼다.
•안미들[安尾坪] : 안동묘 밖이며, 안에 있는 들판의 의미이다.
• 노루목 : 원래는 하천이었으며 물이 휘감아 돌아 천천히 놀면서 흘러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
진 지명이다. 안밑들과 같은 곳이다.
• 대청넘이 : 종선정 좌측 얕은 등성이 너머에 있는 들이다. 높은 바위에 비봉대(飛鳳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뒷골 : 큰 마을 앞쪽, 음지마의 뒤쪽에 있다. 봄이면 왜가리가 날아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큰장골 : 골이 크게 깊지는 않지만 길쭉하게 생겨서 붙여진 지명이다.
• 작은장골 : 공동묘지 뒤쪽에 있으며 큰장골 남쪽에 있다. 지금은 산이지만 옛날에 밭으로
경작하던 흔적이 있고, 6.25전쟁을 전후하여 공비들이 은신했던 은신처가 있다.
• 선바위골[立石] : 높이 5m 정도의 바위가 서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에 부녀자들이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렸다.
•밭두득골·밭드득골 : 선바위골 입구 좌측골이다. 높은 둑으로 된 밭이 있었다.
•띠밭양지 : 띠(떼)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양지 바른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중무덤골 : 절골에 있던 사찰의 스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중턱에는 공동묘지의 토성이 있다.
•찔레래골 : 찔레나무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 송골 : 찔레래골 안 좌측골이며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이다.
• 구들배음달 : 구들장을 채취하던 곳으로 매우 음지이다. 찔레래골 우측골이다. 이곳을 넘어
가면 정골을 거쳐 가시골로 연결된다.
• 사고터 : 태백산 사고가 생기기 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곳으로 주춧돌이 남아 있다.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부인들의 화전 놀이터로 이용되었으며 가시골로 넘어
가는 길이 있었다.
• 큰절골 : 시대 불명의 절터에 주춧돌이 남아 있다. 입구에 소(牛) 공동 매장지가 있다. 토성
으로 경계가 되었다.
• 작은절골 : 큰절골과 등 하나 사이에 있다. 골이 조금 작다.
•긴사리 : 밭의 골이 길어서 생긴 지명이다. 밭 가장자리에 맑은 샘이 솟아난다.
•비봉산 :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비봉대가 있다.
•가매골 : 골의 형상이 가마솥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승지무·성지미·승지무(僧智舞) : 옛날 지(智)라는 고승이 이곳의 산세를 살펴보니 천하의
명당이라 너무 기뻐서 둥실둥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큰성지미·작은성지미가 있다.
• 마당양지 : 햇볕이 오래도록 쪼이는 양지 바른 곳에 마당과 같은 편평한 밭이 있어서 붙여
진 지명이다.
•봇들 : 큰 보가 3개 있다.
- 상보 : 마당양지 앞들의 제일 상류에 있는 보이다
- 중보 : 중간에 있는 보이다.
- 말보 : 제일 아래쪽에 있다

마장들·마장(馬場) : 구 역원(旧驛院)으로 역마 사육장이 있던 곳이어서 마장들이라 불리
었다. 마을 앞에 장승배기가 있었다. 역원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은 경주 최씨가
와서 살게 된 후부터이며, 이 지방에서 가장 넓은 들을 끼고 있다.

•중등 : 마장들 앞에 있는 넓은 들이다. 문촌 본동리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밭이다.
•등끝 : 마을 뒤 등이 내려오다 끝난 곳이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 굼논 : 마장들 앞에 있다. 논의 위치가 구렁(구릉)처럼 생긴 곳에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며
항상 물이 많아 뱀장어 등이 서식한다.
•돌배나무골 : 돌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가마골 : 숯을 굽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가시골·시동(柴洞) : 가시가 많은 이곳은 기촌(杞村)에서 3㎞ 떨어진 곳으로 북동쪽이 명
호면과 접해 있으며 구릉지에 약간의 전답이 있는 깊은 골짜기이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연안 송씨가 우거하여 60여 가구를 이루고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외지로 이사 가고, 산
기슭의 돌무더기에 집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동묘 : 가시골 마을 앞에 있다.
•배나무모퉁이 : 옛날에 큰 돌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부엉이 음달 : 부엉이가 울던 매우 응달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사부랭이골 :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라 태자가 넘었다는 신라재가 옆에 있다. 작은 사부랭
이골도 있다.
• 쿵자지골[君子之谷] : 신라골 안에 있다. 군자가 사는 골짜기의 의미이다.
• 신라골 : 신라 태자가 내령군(봉화 옛 지명)에 왔다가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어 같
이 서라벌로 돌아갈 때 이 재를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산 중턱에 있는 약물탕
은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
•통시골 : 오목하게 생겨서 붙여진 지명이다.
• 송구대밭골 : 신라골 안에 있다. 곧고 굵은 소나무가 많아 흉년이 들면 송기(소나무의 속껍
질)를 벗기던 곳이다. 송기를 벗긴 소나무를‘ 송구대’라고 한다.
• 생치골 : 신라골 안에 있다. 짐승이 많아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였다고 한다. 꿩이 많이 살아
서[生] 붙인 지명으로 추측된다.
• 뜨슴골 : 지형이 따뜻한 양지 바른 곳이어서 추운 겨울에도 바람 한 점 없어 행인들이 쉬어
가던 곳이다.
• 정골 : 옛날 토기를 굽던 곳이며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상당히 넓은 묵은 밭이 있다‘. 점
골’의 변형이다.
•미골 : 따뜻하고 터가 좋아서 묘를 많이 쓰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밤나무골 :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골’이라 하며, 지금은 조금만 남아있다.
• 색시골 : 아름다운 새색시가 산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다는 애달픈 전
설이 있어‘ 색시골’이라 부른다.
•멍두골(멍득골) : 산딸기인 멍두딸[멍석딸기]이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멍두골’이라 한다.
•상아골 : 멍두골과 금정골 사이에 있다.
•금정골 : 일제강점기에 금광이 있던 곳이며 현재도 굴이 남아 있다.
• 주머니 밭골 : 옛날에 산적이 많아서 지나는 행인이 주머니를 털리는 변을 많이 당하던 곳
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성이바위골 : 성이[石珥]가 많이 나는 바위가 있다.
•굴바위골 : 숫돌목 아래이다. 높은 바위 중턱에 석굴이 있다.
• 숫돌목 : 숫돌 장수가 쉬어가던 곳이며 질이 좋은 숫돌이 생산되기도 했다. 이 고개를 넘으
면 명호면 관창리 갈골이다.
• 진송이재 : 숫돌목에서 명호면 고감리(골안) 삼거리로 통한다. 재가 길어서 생긴 지명이다.
신라리와 관창리 주민들이 봉성장을 다니면서 이용하였다.

구진밸·구진벨·구진(九津) : 기촌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시냇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야 하
므로 구진이라 불렀다. 구진밸이라 함은 이곳은 심산유곡 산비탈에 촌락이 형성되어 있어
구진과 밴달(언덕)의 합성어로 구진밸이라 불렀다. 이 곳은 평택 임씨가 개척한 곳으로, 현
재 몇 집만이 살고 있다.

• 독지골 : 입구에 독을 만들던 옹기굴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옛날에 송이가 많
이 생산됐다.

묵노골 : 호평과 마장 사이에 있는 산간 벽촌이다. 150여 년 전 평택 임씨가 와서 개척하였
다. 이 마을에는 묵은 밭이 많다고 하여‘ 묵노골’이라 불렀다.

• 뒷골 : 묵노골 뒤쪽에 있다. 아랫마을 뒷골이라고도 한다. 옹기 제조에 쓰이는 좋은 흙이 생산된다.
• 깊으실[深谷] : 상운으로 가는 길이다. 골이 깊고 길어서 생긴 지명이다. 깊으실 입구에 옹
기 굴이 있어 옹기를 구웠다.

범들·호평(虎坪)·범들이 : 산림이 우거져 범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범들’이라 불렀다. 옛
날부터 경주 최씨·밀양 박씨 두 성씨가 살았으나 지금은 외지로 전부 나가고 사람이 살던
곳은 전답으로 변하였다.

기프실·기푸실·심곡(深谷) : 기촌에서 서쪽으로 1㎞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옛날부
터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기푸실’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 마을은 약 150여
년 전 연안 송씨가 개척한 곳으로 지금도 송씨 몇 집이 살고 있다. 기프실 앞 상운·봉성
간 도로 변에 느티나무(수령 약 400년)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아래기프실 : 기프실의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아래기프실’이라 부른다.
•윗기프실 : 기프실의 위쪽에 있다고 부르는 지명이다.

갈골[葛谷]·갈동(葛洞) : 웃기촌의 서쪽 산협에 있는 마을이다. 칡덩굴이 온 들을 덮은 마
을이라‘ 갈골’이라고 부른다. 또한 검성골과 윗기촌으로 갈라지는 곳이라 하여‘ 갈래골’·‘갈
골’이라고도 한다. 김해 김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 우렁바위골 : 갈골 뒤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옛날 커다란 우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그
밑에 여우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 샘골 : 웃갈골 위의 골이다. 샘이 있어 샘골이라 하였다. 지금도 물이 좋아 5가구가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도장골 : 마당골 바로 위의 골이다. 골이 삼각형으로 생겼다.
•마당골 : 갈골 입구에 들어가서 좌측 첫 번째 있는 골이다.
•배신데이 : 갈골 입구에서부터 기촌가는 방면으로 도로변 좌측에 있는 들이다.
•장구목이 : 옷갈골을 지나서 금성골과 경계이다.

윗기촌·상기(上村)·상기촌(上杞村) : 기촌마을의 상부에 위치하여‘ 윗기촌’이라 불렀다.
약 400년 전 안동 김씨와 의성 김씨가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금은 경주 김씨가 마을을 형
성하고 있다. 1962년에 설립된 문촌초등학교가 농촌인구 감소로 1988년에 폐교 된 후
2010년대 문촌교회가 이곳으로 옮겼다.

• 서치골·서창곡(西倉谷) : 문촌 방앗간에서 새터로 올라오는 길을 서치골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곡식을 저장했던 창고(춘궁기에 식량을 대여해주고 수확한 후 받아들이는 일종의 곡식
은행)가 있었던 자리라고 해서 서창(西倉)골에서 서치골로 부르고 있다.

검성골·검성(儉城)·금성골 : 금상현(琴尙絃)이 이곳에 살았다. 마을의 모양이 성을 쌓은
듯하고 마을 사람들이 특히 검소하다고 하여‘ 검성골’이라 칭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
년 전 봉화 금씨가 이곳에 정착하였다.

• 금성(錦城)골 : 봉화 금씨가 터를 처음으로 잡았다 하여‘ 금성골’이라고 한다. 또한 지형이
비단 같이 산세가 좋아‘ 금성골’이라고도 한다.
• 득골[得谷] : 옛날 이곳은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없었다. 어느 날 노인
한 명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자 사람들의 왕래가 생겨나 골을 하나 더 얻었다 하며‘ 득골’
이라 한다고 한다.
• 집골 : 검성골에서 새터로 넘어가는 재 바로 전 좌측 큰 들이다. 200년 전에 그 골짜기에
외딴 집이 한 채 있어‘ 집골’이라고 한다고 한다. 또한 길 우측에 곳집이 있어‘ 집골’이라
고도 한다.

새터[新基] : 1908년 봉화 최초의 교회인 문촌교회(새터교회)가 세워진 곳이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윗기촌에 살던 인동 장씨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주하던 중 검성골 너머에
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평지를 발견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그곳을 신기 즉‘ 새
터’라 칭했다 한다.

• 마미(馬尾)·마가미골 : 현재 마을 주민들은‘ 마개미골’이라 부른다. 지형이 말꼬리처럼 생
겼다 하여‘ 마미(馬尾)’라 하였으나, 언어가 변천하는 과정에서‘ 마가미’로 부르게 되었다.
• 등골 : 문촌1리 기촌과 연결되는 긴 골짜기로, 새터 맞은 편에 있다. 집은 없고 토지만 있고
땅 주인은 대부분 새터에 거주하고 있다.

무진장(無盡藏) : 신라시대 사찰 무진장사(無盡藏寺)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무진장’이라 일
컬었다. 약 500년 전 봉화 금씨가 이곳에 와서 살았으나 타지로 이사 가고 지금은 경주 이
씨가 많이 산다. 경내에는 3층 석탑이 있으며, 1963년 4cm 가량의 소형 청동제 불상이 발
굴되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무진장재(無盡藏齋)는 현재 재실로 이용하고 있다.
봉화문화원님이 2023-12-26 오전 11:29:00 에 작성하신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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