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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인물

봉화문화원게시판
  등록일 : 2023-02-13 | 조회 : 345 | 추천 : 0 [전체 : 13 건] [현재 1 / 1 쪽] [로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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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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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절 정열(貞烈)
제10절 정열(貞烈)

                                                         * 봉화군사(2022)의 내용을 따름

고령박씨(高靈朴氏)
박수춘(朴壽春)의 딸이다.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세공(洪世恭)의 처(妻)로서 절행(節行)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구를 피하여 함흥 산중에 피난했으나 적을 만나 겁탈하려고 하자 적을 크게 꾸짖으니 드디어 적이 죽였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임금이 친히 정려를 내리고 증(贈)정경부인하다.


월성이씨(月城李氏)
이윤숙(李胤叔)의 딸이다. 흥해인 배인길(裵仁吉)의 처이다. 문장이 능통한 그녀는 배인길이 임진 난에 용궁전투에서 전사하자 손가락을 절단하여 ‘君臣義兮旣重 夫婦思兮還輕’으로 혈서를 쓰고 자결, 사림에서 쌍절(雙節)이라 했다. 고종(高宗) 때 정려(旌閭)하다.


양천허씨(陽川許氏)
군수 허식(許宴)의 딸이다. 충정공 홍익한(洪翼漢)의 처로서 거룩한 행실과 현순한 덕행으로 사랑하고 효도함이 하늘이 내렸다 했다. 인조(仁祖) 정축(丁丑 1637)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적을 만나 자결하니 나이가 28세였다. 인조 을유(乙酉 1645)에 정려하고 증정경부인하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생원 김시강(金是杠)의 딸이다. 전주 이시함(李時咸)의 처로서 남편이 죽자 장구를 점검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숙종 때에 정려하고 창설제 권두경이 사적을 적었다.


반남박씨(潘南朴氏)
박경고(朴景古)의 딸이다. 의성 김필제(金弼濟)의 처로서 남편이 죽자 다른 사람에게 염할 옷을 맡기지 않고 친히 다 바느질하여 대렴한 이튿날 자결하니 영조 때에 정려하고 눌은 이광정이 유사를 지었다.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이원(洪爾遠)의 딸이다. 진천 이명인의 처로서 시집간 지 열흘이 안 되어 남편이 죽자 빈소에 들어가 죽으려고 한 것이 수차례나 되었으나 시아버지 세중(世重)이 구했다. 나중에 친정부모를 뵙고 돌아왔는데 세중의 후처 아들인 명기(命麒), 명인(命麟) 무리가 재산이 욕심이 나서 홍씨가 다른 사람에게 재물을 주었다고 위조서류를 꾸미고 임신했다고 거짓으로 아버지에게 알리니 시아버지 세중이 관가에 고발하였다. 홍씨가 그 소리를 듣고 부모에게 영결하고 스스로 관가에 나가 갇히니 청주 옥(淸州 獄)으로 옮겼다.
아이 밴 흔적을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스스로 젖가슴과 배를 드러내어 아이뱄다는 거짓말에 대한 증거를 대니 시아버지 무리가 도리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홍씨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이 감옥에 나가는 것은 인륜지대변(人倫之大變)이고 몸을 드러내어 보인 것은 이미 욕(辱)을 본 것이라고 밝히고 목을 찔러 자결했다. 유서가 3장이 있는데 2장은 부모에게 영결하는 것이고 1장은 시아버지의 구명을 위한 것이었다. 말뜻이 아주 간결하고 측은했다. 시아버지와 같이 옥에 갇혔을 때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필히 세중에게 갖다 주었다. 하늘이 내린 효심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다.
호서(湖西)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은 이 없어 부물(賻物) 통문하여 운구하는데 고을원이 글제를 내어 선비를 시험하니 원근의 이름난 선비들이 행적을 지어 정열을 표창하고 영남 사림에서 일곱 번 글을 올려 알리니 조정에서 알고 영조 기유(己酉 1729)년에 정려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행원(金行遠)의 딸이다. 김이철(金爾鐵)의 처로서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 효하고 남편은 예로서 받들었다.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강물에 빠져 죽으니 김씨가 울면서 시체를 거두었다. 집이 가난하여 아침저녁 상식 드리기도 어려웠다. 3년 상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그 생질(甥姪) 계옥(繼玉)이 뇌물을 받고 그의 외숙모를 겁탈하도록 하니 김씨가 남편 묘 앞에 가서 목매어 죽었다. 현감 박사한(朴師漢)이 정절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쌀을 주어 장사 지내게 하였다. 이를 조정에 알리니 옹정(擁正) 기유(己酉 1729)년에 정려하다.


지녀박씨(至女朴氏)
삼계에 살던 박(朴)씨 여인은 우개복(禹介福)의 처이다.
21세에 남편이 죽자 문을 닫고 친정집 사람만 왕래하고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다. 수절 8년 만에 사람들이 그 어진 것을 생각해서 재가를 강권하니 지녀가 권하는 사람과 가까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남편 제삿날 머리를 감고 목욕한 후 제사를 지내고 목매어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지극한 행식을 사랑하여 이르기를 ‘至女’라 하고 비를 세우고 기적을 표했는데 창설제 권두경이 기문을 지었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이조봉(李朝鳳)의 딸이다. 봉화 금이현(琴以絃)의 처인데 혼인을 치르기 전에 산이 무너져 남편이 죽었다. 이씨가 이 소식을 듣고도 슬픔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자 부모가 이상해서 지켜보니 잠시 틈을 타서 옷을 갈아입고 빈소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숙종조에 정려하다.


봉화금씨(奉化琴氏)
금중오(琴重五)의 딸이다. 창원 황지신(黃志信)의 처인데 일찍이 과부가 되어 집을 지키고 들어앉아 있는데 한 동네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 흉한 꾀를 품어 사람을 풀어 달래고 위협하니 금씨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놓고 물에 빠져 죽으니 경종조(景宗朝)에 정려하고 이(李)가에게 중벌을 내렸다.


옥천전씨(沃川全氏)
전도열(全道烈)의 딸이다. 의성 김수림(金洙林)의 처인데 남편이 일찍 죽으니 예절을 지키는 데 심히 삼가고 3년 상을 마치고 대상날 저녁에 빈소에 들어가 머리를 양 가닥으로 하여 목에 감고 두 손으로 당겨 죽으니 덮인 옷이 굳게 매어 있었다. 유서가 2장 있는데 하나는 맏동서에게 올리는 것이고 그 하나는 친정에 보내는 것이었는데 각각 부탁이 있었다. 노원 김철수(魯園 金喆洙)가 전기를 지었다.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사건(洪恩建)의 딸이다. 진주 강순영(姜純永)의 처인데 남편의 뒤를 이어 부녀의 도를 닦으니 남편이 죽자 소상 이튿날 순절했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옥윤(玉潤) 처사 권양하(權養夏)의 딸이다. 진사(進士) 진성 이명우(李命羽)의 처인데 태어날 때부터 이상한 기질이 있었다. 시집가서 부녀의 도를 심히 얻었더니 남편 진사가 충성과 효도가 하늘에 뿌리하고 의리가 마음에 있어 경술년 이후 항상 근심하고 분함을 못 이겨 병이 들었다. 권씨가 조용히 나아가 “임금이 편찮으시고 늙은 어버이가 마루에 계시는데 어찌 남자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라고 하니 진사가 깜짝 놀라 억지로 음식을 먹고 마침내 병이 덜해졌다. 경신년 12월에 임금의 소상 하루 전에 모황단(慕皇壇)에 가서 통곡하고 혼절하니 그날 밤 진사 내외가 동시에 약을 먹고 죽었으며 유서가 있었다.
향당사람이 슬퍼하지 아니하는 자 없었다. 이르기를 쌍절이라 했다 그 유서에는 남편이 의리로 맺어서 지금 와서 죽고 말았으니 내가 마땅히 따라 죽어야 된다. 또 말하기를 부부지의(義)는 군신지의와 일반이니 죽은들 무슨 원한이 있으리오. 또 말하기를 친정아버지의 훈계가 여필종부이니 잊어버릴 수가 없다 했다. 정산 김동진(貞山 金東鎭)이 전기를 지었다.


반남박씨(潘南朴氏)
박동해(朴東海)의 딸이다. 봉성 금진옥(琴振玉)의 처인데 21세에 일찍이 과부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묶여가서 스스로 자결하니 죽은 후에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사림에서 누차 관가에 고발하여 사실을 밝혀줄 것을 요청하니 마침 흉한이 잡혀서 법으로 다스렸다. 정절이 높다고 썼으나 정려는 하지 않았다.


함안박씨(咸安朴氏)
박원희(朴元熙)의 딸이다. 우계 이간욱(李間旭)의 처인데 정성이 뛰어나서 남편의 병에 몸소 시병(侍病)하니 밤에 눈을 붙이는 일이 없었고, 하늘과 귀신에게 비는데 그 극진함이 다하지 않는 데가 없었다. 남편이 마침내 죽으니 박씨가 울고 뛰며 예를 다하여 제사 지내고 담사를 마친 후에 당내(堂內) 사람을 모아 환담을 흡족하게 하고 그날 밤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유서 2장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뒷일을 부탁하는 내용이 심히 자세했다. 사림이 모여 집 뒷산에 장사지내고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이 찬기명(撰記)하다.


박소사(朴召史)
밀양 박용문(朴龍文)이 딸이다. 곽덕개(郭德介)의 처인데 얼굴이 잘났고 시부모님께 효도를 다했다. 마침 남편이 공부하느라고 30리 밖에 가 있었는데 하루날 밤에 그 남편의 일가 완실(完實)이란 자가 감히 음란한 마음을 품고 박소사가 문을 걸고 밖으로 나올 때 불연히 가서 손목을 잡으니 박소사가 놀라 짚신으로 무수히 때리고 얼굴을 가리고 방에 들어가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은 지 21일 만에 문을 열고 목매어 죽었다. 고종 갑신(甲申 1884)에 정려하고 자산(紫山) 금우열(琴佑烈)이 찬기하다.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운섭(金雲燮)의 딸이다. 남양(南陽) 홍사도(洪思燾)의 처인데 어릴 때부터 행실이 매우 착했고 시집간 후 아들 없이 남편이 죽자 김씨가 슬픔 속에 손으로 염구(殮具)를 꾸며 장사(葬事) 지내는데 조그마한 잘못이 없도록 하고 목매어 죽으니 사림에서 장사 지내다.


의성김씨(義城金氏)
학봉 金誠一의 9대손인 윤수(崙壽)의 딸로 태어나 19세에 晋州 姜氏에게 출가하였다. 夫君이 학문에 전념하여 大小試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기쁨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아버지인 이조참의 夏奎의 시병을 극진히 하다가 부군이 기력이 약해져 자리에 눕게 되었다. 친정아버지가 다녀가면서 딸에게 하는 말이 “사위의 병이 남지 아니하면 다시 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부친의 말씀을 명심하여 극진히 간병하였으나 별 보람도 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관 옆에서 통곡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식사하기를 권했으나 그는 식음을 전폐한 지 8일 만에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쳤다. 시백부 姜漢奎가 실기를 쓰고 나라에서 정려가 내렸다.
이율의 처 인동장씨(李葎의 妻 仁同張氏)
본관은 인동으로 열행으로 정려를 받다.


풍산김씨(豊山金氏)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딸로 권식(權軾)의 부인이다. 부군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소상(小祥)을 치르고 깨끗이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뒤 시렁에 목을 매어 순절하였다.


진성이씨(1788~1818)
진성인 이시순(李時淳)의 딸로 태어나 권계하(權啓夏)와 혼인하였다. 부군 계하는 재덕(載德)의 외동아들로서 충재의 11代 종손으로 종가에 들어가서 進士가 되었으나 소생도 없이 세상을 떠나니 부인은 죄인으로 자처하고 애통으로 지내면서도 생가의 시부모님을 정성으로 봉양하면서 종택을 지켰다. 혼자된 지 넉 달만에 부인은 유언을 남기고 부군의 뒤를 따라 순절하였다. 府使 유범휴(柳範休)는 부인의 유사를 쓰고 洗馬 강필효(美必孝)는 묘지문을 썼다.


옥천전씨(沃川全氏)
본관은 옥천으로 奎英의 딸이다. 李義魯에게 출가했으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뒤따라 자진했다.


풍천임씨(豊川任氏)
부인은 용담(龍潭) 임흘(任屹)의 후예로 士人 순재(順宰)의 딸이다. 어머니는 진주河氏니 死六臣의 한 분인 단계(丹溪) 위지 (緯地)의 후예이다.
1914년에 안동시 도산면 온혜(溫惠)마을에서 태어나 17세 때 안동 김중일(金重鎰)과 혼인하였는데 夫君은 참판 仁輔의 후예며 호군벼슬을 한 相東의 증손으로 3대 독신이었다. 결혼한 지 겨우 1년에 부군이 세상을 떠나니 이팔靑春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또 시모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홀로 된 시아버지를 모시며 살았는데 주위에서 재가를 권하면 10대 종사를 누구에게 맡기고 가겠느냐 하였다. 효성을 다해 봉양하며 재종질을 양자로 들여 강보의 아이를 정성으로 길러 일가를 이루었다. 부인의 효와 열행이 널리 알려지자 1971년 6월에 洛左 全弘基가 부인의 실기를 저술하였다.
봉화문화원님이 2023-02-13 오후 12:11:00 에 작성하신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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