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BONGHWA CULTURAL CENTER

봉화의 인물

봉화문화원게시판
  등록일 : 2023-02-13 | 조회 : 527 | 추천 : 0 [전체 : 13 건] [현재 1 / 1 쪽] [로그인]
이름
봉화문화원
제목
제 9절 효순(孝順)
제 9절 효순(孝順)

                                                         * 봉화군사(2022)의 내용을 따름

의성김씨(義城金氏)
진사 율(瑮)의 딸이다. 진성 이□람(李□擥)의 처인데 일찍이 과부가 되어 아들 여섯을 바르게 교육하여 모두 진사(進士)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에 피난하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씨가 마당 가운데 거적을 깔고 슬피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어찌 차마 이러한 일이 있을꼬.” 했다. 이러한 사적이 안동 와룡면지(臥龍面誌)에 자세히 적혀 있다.


창녕성씨(昌寧咸氏)
성석하(成錫夏)의 딸이다. 縣監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의 처로서 성품이 어질고 자상하여 부덕을 갖추었다.
향당이 모두 사모하고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이 유사를 지었다.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영택(金榮宅)의 딸이다. 광산(光山) 김도정(金道貞)의 처로서 부덕이 있어 시집이 몹시 가나하였으나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김씨가 재산(才山)에서 고계(古界)로 이사를 왔으나 당겨도 먹기 어려웠다. 뒤에 안동 가구(佳丘)로 돌아가서 남편이 조상 산소에 갔다가 해(害)를 당해 죽었다. 김씨가 슬퍼하는 것이 거의 죽을 것 같았고 겨우 소대렴을 해놓고 김씨가 염병에 전염되어 찬 곳에 누워 찬물을 먹고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으나 늙은 시부모와 젖 먹는 아이가 있는지라 차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일어나 미망인으로 자처하고 남의 잔치에도 가지 않고 길쌈과 바느질로 시부모를 모시고 아들 윤규(閏圭)를 문학으로 성취시켰다. 외암(畏巖) 김도명(金道明)이 행장을 지었다.


풍산김씨(豐山金氏)
김종도(金宗道)의 딸이다. 흥해(興海) 배달주(裵達周)의 처인데 신행 온 후 한 달이 안 되어 남편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다. 남편 따라 죽고자 하니 시아버지가 간절히 달래어 강하게 마음을 돌려먹고 지극히 시아버지를 섬기고 여생을 마치니 일향이 어진 효부라 하고 사림이 관에 알려 표창했다.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傳을 지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조성옥(趙性玉)의 딸이다. 安東 권기연(權琪淵)의 처인데 성품이 인자하고 효순해서 시부모를 섬기는 데 어김이 없었다. 뜻과 몸을 바르게 하고 용모가 단정하고 목소리가 화창하며 기품이 안정하여 즐겁고 성내는 것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길쌈하고 바느질해서 조상 제사를 극진히 모셨다. 그 후 혼자되어 아들을 옳게 교육하여 훌륭하게 키웠다. 아들이 살림이 가난함을 근심하니 조씨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의 학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다른 것을 근심하리요.” 그 아들 상익(相翊)이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따라서 큰선비가 되었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영중의 딸이다. 권심관(權心觀)의 처인데 일찍이 부녀의 행실이 있었는데 시아버지를 효로서 섬기는 데 지극하였다. 하루는 꿈에 옥황상제가 사자(使者)로 하여금 비단버선을 주면서 말하되 “너의 성효(誠孝)를 느껴서 주노라.” 하였다. 또 꿈에 시조부 호군공(護軍公)이 허리에 매는 각대를 주면서 말하되 “너 같은 효도는 반드시 어진 아들이 있으리라.” 했다. 이를 믿었더니 과연 그 달부터 임신이 되어 아들 종도(宗道)를 낳으니 귀 밝고 눈 밝고 재주와 덕이 뭇 사람과 크게 다르니 이웃마을이 모두 말하기를 이 부인의 덕이라 하였다. 손자(孫子) 정선(正善)이 유사를 지었는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청주정씨(淸州鄭氏)
정준(鄭俊)의 딸이다. 반남(潘南) 박구양(朴龜陽)의 처인데 곱고 단정하고 현숙했다. 일찍이 과부가 되었으나 수절하고 유복자 승원(勝元)을 길러 효행으로 집을 이루었다. 이눌암(李訥菴) 교각(敎珏)이 비명을 지었고 권옥전(權玉田) 상용(相用)이 유사를 지었다.


선성김씨(宣城金氏)
김휘건(金輝健)의 딸이다. 원주 변우균(邊禹均)의 처인데 부녀의 덕과 거룩한 행실이 있어 남편을 올바르게 섬기고 시부모를 받드는 데 효로서 하니 집안이 화목했다. 옷이 떨어진 것을 입으면 위생에 해롭고 음식이 깨끗하지 않으면 병이 든다고 하고 또 집안에 일이 있으면 몸소 먼저 하고 남의 어려움을 들으면 반드시 먼저 구제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선비 집안의 모범이 되었다.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유사를 지었다.


청송심씨(靑松沈氏)
심도인(沈道仁)의 딸이다. 청주 정동규(鄭同逵)의 처인데 남편이 난치병이 있어 심씨가 지성으로 구료하고 하늘과 귀신에게 비니 감응이 있어 남편의 병이 나았다. 사적이 명륜록(明倫錄)에 올랐다.


안동김씨(安東金氏)
김병여(金炳呂)의 딸이다. 청주 정영흠(鄭寧欽)의 처인데 성품이 민첩하고 부녀의 행적이 있어 성효가 하늘에 타고났다. 시어머니가 만년에 2년 동안 종기가 나서 고통스러워하자 김씨가 지성으로 구료하는 데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숟가락질, 젓가락질, 머리 빗는 것은 반드시 시어머니를 대신해 주었고 종기에서 나오는 고름과 대소변을 조석으로 씻는 것은 매일하는 일로 알았다. 시어머니가 죽자 슬픔이 넘치도록 하고 제사에 예를 갖추니 향리에서 모두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고 그 사적이 청주 정씨 금석록(金石錄)에 올려 있다.


안동김씨(安東金氏)
김하균(金夏均)의 딸이다. 의성 김완식(金完植)의 처로서 성품이 지극히 효도해서 이상한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그 시아버지께 갖다 드리고 또 시아버지가 나이가 많아 병이 심히 급하거늘 대소변을 그 자리에서 누었다. 김씨가 조석으로 깨끗하게 씻었는데, 그것을 남이 보지 않도록 했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여 문 앞에 있는 조그마한 도랑에 가서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았는데 크기가 나무 송곳만 했다. 따뜻하게 달여서 드리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성효(誠孝)로 이룬 것이라 하여 표창했다.


신안주씨(新安朱氏)
주재술(朱載述)의 딸이다. 봉성(鳳城) 금병덕(琴秉德)의 처인데 나이 15세에 시집와서 5년 만에 궁벽한 곳에서 남편이 죽었다. 동네에 무뢰한 사람이 있어 밤을 타서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담을 뛰어넘어와 주씨를 동여 묶어 가려고 하자 주씨가 크게 꾸짖고 당당하게 나오니 무뢰배가 놀라 도망갔다.
집안이 가난하고 형세가 없었으나 다른 뜻은 없고 어버이 섬기는 데 지극했다. 조석으로 받들고 의복을 깨끗이 하여 입과 몸에 맞도록 했다.
시아버지가 늙어 병이 위급함에 하늘과 귀신에게 비니 주먹만한 꿩 새끼가 날아드는 이상한 징험(徵驗)이 있었다. 권명섭(權命燮)이 찬명하다.


청주한씨(淸州韓氏)
강씨(康氏) 성을 가진 사람의 아내이다. 행실이 지극하여 집안이 가난했는데도 시아버지 모시기를 극진히 했다. 시아버지 병이 위중한데 의원이 말하기를 올빼미의 쓸개가 약이 된다 하거늘 한씨가 지극한 정성으로 구하는데 하루는 올빼미 두 마리가 정지 가운데 날아들었다. 한씨가 그 들개를 내어 시아버지에게 드리니 곧 병이 나았다. 이웃에서 듣고 모두 이상하다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효도에 대한 이야기는 남의 귀와 눈에 들어가서 파다했다. 상운면 효부 설화에 나온다.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영창(朴永昌)의 딸이다. 안동 김홍기(金弘基)의 처인데 효행이 지극했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들에 갔다가 발을 다쳐 여러 달 앓으니 박씨가 단(壇)을 쌓고 귀신에게 빌었다. 病者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 소래기가 꿩을 잡아 뜰 안에 떨어뜨리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창열(李昌烈)의 딸이다. 안동 권태주(權泰柱)의 처인데 효행이 뛰어나서 시아버지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했다. 흉년이 들면 들에 가 이삭을 주워 조석을 봉양했고 부부간에도 지극히 사랑하고 공경했다. 6·25사변에 그 남편이 옥에 갇혀 형을 받았는데 이씨가 춥고 더움을 피하지 않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음식을 장만하고 수건과 버선을 빨아 옥에 가서 남편의 동태를 살피고 원통함을 호소했다. 집이 100여 리나 떨어져 있는데 가난하여 걸어서 다니기를 4~5년이나 되었다. 관청에서 그 사실을 알고 정성에 감복하여 남편의 형을 줄여 석방하자 마을에서 크게 찬사했다. 그녀가 죽자 사림에서 그 행위를 아름답다 하여 비를 세웠다.


연안이씨(延安李氏)
이상호(李相鎬)의 딸로 권률(權葎)의 부인이 되었다. 시부모를 잘 섬겼는데 돌아가신 뒤에도 슬픔으로 3년을 지내며 죄인으로 자처하고 날죽으로 연명하여 사림에서 효부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글씨와 자수에도 뛰어났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이만현(李萬鉉)의 딸로 全州人 柳在秀와 혼인하였다. 출가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인사불성의 이름 모를 병에 걸리자 정성껏 구료하고 가사를 돌보았다.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인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가까운 친척도 없고 늙은 시부모를 모시면서 예에 따라 장례를 지내고 3년간 상주로서 슬퍼하면서도 시부모 앞에서는 슬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얼마 후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니 장사를 잘 지내고 늘 애통하였다. 딸 3형제를 출가시키고 나자 시아버지의 이가 모두 빠져버렸다. 그러자 콩가루로 죽을 끊여 입맛에 맞게 하고 누룩 찌꺼기로 술을 담아 드리고 한낮에는 김매고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땔나무를 해다가 시부의 방을 따뜻하게 해드렸다. 이렇듯 30년 세월이 지나자 몸은 늙고 병이 나서 약해질 무렵 시부가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부인은 농사하랴, 땔나무 하랴, 약 구하랴, 대소변 받아내랴, 한겨울에도 빨래를 하루 3번 하는 등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마침내 시부가 별세하자 사위들과 함께 정성껏 장례를 치르니 모두들 참 효부라고 칭송하였다. 里長 金潤洛이 그를 위해 효도 연을 베푸니 700여 명이 모여들어 칭송하였다.


안동김씨(安東金氏)
본관은 안동, 김석규(金奭圭)의 3녀로 태어나 18세 때 의성 金斗鎬와 결혼하였다. 시가는 빈농이었고 시모는 청각 및 언어장애에 식도암으로 난치병 환자인 편시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일순도 근심을 갖게 한 일이 없었다. 그 윗대 무부모 종질 3명을 내 자식같이 길러 성취시키는 등 매사가 타의 모범이 되어 2001년 4월 26일 전국 보화대상을 수상하였다.
봉화문화원님이 2023-02-13 오후 12:13:00 에 작성하신 글 입니다.
다음글
제10절 정열(貞烈)
이전글
제 8절 효자(孝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