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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인물

봉화문화원게시판
  등록일 : 2023-02-13 | 조회 : 371 | 추천 : 0 [전체 : 13 건] [현재 1 / 1 쪽] [로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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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절 효자(孝子)
제 8절 효자(孝子)

                                                         * 봉화군사(2022)의 내용을 따름

김이음(金爾音)
字는 伯玉이고 호는 삼로공(三路公)이며 본관은 함창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재질이 뛰어나며 학문에 전념하여 공민왕 23년(1374)에 문과에 합격하여 조선 태조 때 검열, 정언 직제학 편수관을 거쳐 嘉善大夫 戶曹參判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善山府使, 진주목사를 거쳐 江原監司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명관록에 올랐다. 부친이 병환에 들자 사직하고 장기간 시병에도 성심을 다하였다. 대소변이 모양과 색깔이 다를 때는 친히 맛을 보았다. 병세는 악화되어 가면서 한겨울에 복숭아를 원하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天帝에게 기도하니 天桃가 흰 눈에 떨어져 있어 이것으로 병이 쾌유되었다는 설이 있다. 공은 그 후 어버이의 상중에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냉방에 거적자리로 3년 동안 한번 갈아입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죽과 소금으로 연명하면서 오직 슬픔에만 잠겨 집이 있을 곳을 향해 보지도 않았다. 3년 상이 끝난 뒤에도 매일 4번씩 성묘하였다. 20리의 험한 산중 길을 새벽에, 한낮에, 저녁에, 한밤중에 갈 때 성묘하고 돌아오니 발자국 길 하나 지팡이 길 둘 합하여 길이 3개 생겨났다하여 사람들이 三路라 하고 士林에서 孝子三路先生에 대한 행적을 보고하니 太宗때 정려가 내리고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라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하였다. 士林에서 영주 이산면 三峯書院에 배향하고 효자비는 다니는 길목에 세웠는데 왜놈들이 큰길을 닦는다고 핑계로 현재의 위치인 봉화읍 문단 2리 요산(腰山)에 옮겼다. 공의 저서로는 중국 사신 陸禮部와 목은 이색(李穡)과 적약재(勣若齋) 金九容과 함께 읊은 시집과 陽村 권근(權近)이 공을 보내고 지은 글이 전한다.


김극일(金克一) 1382~1457
字는 용협(用協)이고 호는 모암(慕庵)이며 본관은 김해로서 효성이 깊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아침저녁 문안의 예를 지켰다. 부모가 병상에 있을 때는 한시도 떠나지 않고 시병을 하여 심할 때는 대변의 맛을 보았다고 한다. 또 평상시에는 밤을 낮 삼아 글공부를 열심히 하여 문장과 시문에도 능하였다. 부모 사후 3년 여막생활 중 소금과 죽으로 살았다. 이렇듯 효성이 지극하여 세종 때 孝子旌門이 내렸으며 관직은 司憲府持平에 이르렀고 淸道 紫係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포(李苞) 1549~?
조선 13대 명종 4년(乙酉)에 출생하였다. 字는 중용(仲容)이고 본관은 경주로서 눌재(訥齋) 弘準의 손자이다. 일찍이 生員을 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강직하여 수령의 가혹한 정사에 격분하여 박민도(剝民圖)를 그려 조정에 올리니 임금께서 극찬하고 그 그림으로 병풍을 만들어 정치에 크게 반영시키고 그 공으로 집현전 참봉을 하였다. 원래 出天之孝로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할 때 극진히 구료하여 병을 고쳤다. 국령(國令)으로 효자정려가 내렸다.


금기(琴椅) 1489~1552
字는 仲村이고 호는 해촌(海村)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進士試와 문과에 합격하여 내직에 있다가 부모봉양을 위해 영천(榮川)군수로 자원해 왔다. 어머니의 상중에 큰 까마귀가 상여를 따라다녔다. 그 후 공이 애통하는 마음이 깊어 이로 인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니 큰 까마귀는 2년 동안 집에 와서 슬피 울었다. 또 기일에는 반드시 집안 나무에 앉아 우니 모두들 기이하게 여겼다.


금홍달(琴弘達) 1633~l705
安字는 준경(俊卿)이고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以古의 손자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환 중에 초두구(草 寇 : 약초 이름)를 구하는데 날아가던 까마귀가 초두구 봉지를 떨어뜨렸고 또 늦은 가을에 은어를 구하려고 江村에 나갔더니 은어가 홀연히 뛰어오르는 것을 잡았고 한겨울에 꿩알을 원하기에 눈을 밟고 산에 올라가니 도중 정이 알을 품고 있어 쉽게 구했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효성이 뒷받침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평하였다. 육십 세에 친상을 당하여 조석으로 성묘할 때 추위, 더위, 비바람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우애가 지극하며 형제가 분가하지 않고 한 지붕 안에 살았다. 순조 때 정려가 내렸다.


권용형(權用衡) 1674~1753
字는 自平이고 호는 龜巖이며 본관은 安東으로 陶谷 鈞의 후예다. 어려서 小學을 배우고 감동하여 言行을 소학에 따르며 부모봉양은 물론이고 6년 상에 여막에서 하루같이 좁쌀죽과 소금을 먹으면서 주야로 호곡하니 손발이 붓고 피골이 상접하였다. 탈상을 하고 보니 모두가 효자라고 칭송하므로 영월 땅 깊은 산골에 숨었으나 마침내 군민들이 알게 되어 충청도 진천(鎭川)으로 이거하였어도 또한 그리하였으며 세상을 떠나자 江原, 慶尙, 畿湖 등 각도에서 소를 올려 持平벼슬을 제수 받고 동산사(桐山祠)에 제향되었다.


금사하(琴師夏) 1676~?
字는 士明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관직은 通德郎이었는데 어머니가 엄동에 병이 들어 은어를 먹고 싶다고 하니 구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강가에서 울고 있을 때 은어가 얼음 속에서 나왔다. 친상과 함께 숙종이 1720년에 서거하니 단을 쌓고 3년간 여막 생활을 李師周와 함께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울면 호랑이도 같이 울고 절을 하면 호랑이도 같이 절을 하여 世人들이 琴孝子 義虎라고 칭송하였다.


금당(琴讜) 1758~1824
字는 맹직(孟直)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효성이 지극하여 8살 때 아버지가 귀양살이 하던 곳에서 세상을 떠나므로 반장하여 여막을 짓고 통곡하며 집상하는 태도가 성인 효자에 다름이 없었고 늦게 어머니 상 때에도 매일 성묘하여 묘소에 오르는 언덕에 풀이 나지 않았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고 의지가 굳어 당대 선비들이 추앙하였다. 저서로는 詩集이 있다.


전준흠(全濬欽) 1785~l840
字는 여철(汝哲)이고 호는 수재(修齋)로서 어머니 병환 10년에 허리띠 한번 풀지 않고 정성껏 간호하였다.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구해다 드리고 밤에 꿩이 날아들어 반찬을 하였다. 돌아가신 후 3년 시묘(侍墓) 생활을 죽과 소금으로 지냈다.


금기일(琴基一) 1836~l896
字는 치벽(穉壁)이고 호는 초은(樵隱)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여 伯氏인 基萬과 함께 3년간 여막에서 집상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알려져 효자라 칭송을 받았다. 理學經濟, 河圖洛書에 통달했으며 저서로 憔隱集이 있다.


이규진(李奎鎭) 1777~?
字는 응삼(應三)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용모가 수려하고 기상이 늠름하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아버지의 병환이 심하여 온갖 약을 다 썼으나 효험이 없는데 의원의 말에 따라 입으로 매일 6번 빨았더니 7년 만에 쾌유하였다. 그 후에 대추 떡을 찾는 것을 꿈에 신선의 도움으로 이루었으며 겨자나물을 찾을 때는 까마귀가 물어다 주었다. 또 겨울에 잉어를 찾으니 어부가 갖다 주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기를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도와준 것이라 하였다.


이석지(李錫智) 1667~1729
字는 달삼(達三)이고 호는 송관(松關)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基泰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 부모상을 당하여 3년을 하루같이 조석으로 성묘하여 하늘이 낸 효자라고 士林에서 표상하였다.


권택신(權宅信) 1738~l825
字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사모당(思慕堂)이며 본관은 安東으로 慶餘의 아들이다. 가난하여 부모 봉양이 힘드나 정성껏 받들며 힘써 일하여 가정을 꾸려나가니 호랑이가 노루를 잡아주고 갔다. 헌종 때 兩道의 士林에서 장계를 올리니 효행으로 교관이 되었다.


이속봉(이점단 李屬奉) 영조(英祖) 때
조선 제21대 영조 때 재산면 동면리 다래바위(달바위)에 살았다. 본관은 양양(襄陽)이나 후에 자손들이 全州로 고쳤다. 이 효자(孝子)의 부친이 호식(虎食)을 당하자 이속봉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활 쏘는 법을 배워 명포수가 되었다. 어느 날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 원수를 갚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범을 99마리 잡고 100마리째에 가서 “이 한 마리만 잡으면 원수를 다 갚는구나.” 하고 입을 열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100마리째 호랑이가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고 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놓아주었다고도 한다. 호랑이들이 다래바위에 와서 놀기를 좋아했으나 점단이 무서워 못 온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전해온다. 달바위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신선봉(神仙峰)으로 이속봉이 100마리째 사냥가기 전에 “내 신발이 엎어져 있으면 죽을 줄 알아라.”고 말한 뒤 돌아오지 않자 마을사람들이 찾아 나섰으나 사람은 없고 신발만 엎어진 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孝子 내외는 효성이 지극하여 눈먼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집에서 30리 거리인 뱀장골에 가서 일하고 있어도 어머니가 “점단아!” 하고 부르면 알아듣고 달려왔다고 한다. 점단 내외가 산에 가서 나무열매를 따서 기름을 짜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하루는 점단의 어머니가 나무 열매 기름을 구정물인 줄 알고 수채에 쏟아버렸다. 그러나 효자 내외는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하고 편히 모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유명한 박문수(朴文秀) 어사가 이 지방에 왔다가 듣고 조정에 보고하여 특사(特賜)로 세록(世祿)을 하사받고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증직(贈職)했다.


이구현(李九顯) 1786~l854
字는 二則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克植의 아들이다. 인자한 용모에 효성과 우애가 하늘에서 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극직하였으며 학문과 행금이 엄정하여 文孝를 겸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권중기(權重琦) 1840~l920
字는 汝衡이고 호는 삼회당(三悔堂)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宗山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니 꿩이 스스로 망태기에 날아들고 성성이가 산돼지를 잡아주어 아버지 반찬에 썼다. 또한 文行이 있어 유고가 있으며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기하(權綺夏) 1846~l895
字는 秀文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載會의 아들이다. 효행이 지극하여 어버이 나이 90살에 추운 겨울날 연뿌리를 원하므로 두꺼운 얼음을 깨고 물 속을 헤치고 연뿌리를 구해 바쳤으며 종기가 심하자 입으로 그 고름을 빨았다. 또 메뚜기가 약이라고 하니 엄동에 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논두렁을 찾아다니던 중에 까치가 울며 땅을 파고 있기에 가서 파보니 메뚜기가 나왔다.


김구림(金九林) 1868~l912
字는 순성(舜成)이고 본관은 의성으로 永文의 아들이다. 천성이 굳고 용모가 순수하며 집안이 가난해도 알뜰히 일을 하여 집을 잘 꾸려나갔다. 어버이가 병들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치유시켰으며 친상을 당하여는 언제나 슬픔 속에 죽과 소금으로 연명하여 세인들이 모두 효자라 칭송하였다.


이오규(李五奎)
본관은 영천으로서 명호면 북곡리 조래실에 거주하여 文明山의 화전민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 가는 처지로 부친인 李長春을 내외가 지성으로 봉양하여 모두들 효자라 칭송하였다. 70세경부터 두 다리가 부자유한 까닭에 성질이 몹시 거칠었는데 五奎부부는 부친이 원하는 바는 다 해드렸다. 한겨울에 뱀을 잡아 달여 드렸고 꿩을 원하면 꿩을 잡으려고 애쓰는데 장끼 한 마리가 저절로 날아들었다. 부친이 이웃이나 山川을 구경하고 싶다면 지게에 지고 십 리까지라도 다니며 구경시켜 드렸다. 살림살이가 매우 가난하였으나 찰밥과 고기반찬은 떨어지지 않았다. 유림에서 가상히 여겨 안동부사와 경상감사에게 진정을 하여 여러 번 보상을 받았다. 나라에서는 참봉으로 임명하였으며 유림에서는 유계를 모아 그 효행을 기리었다. 그때의 계첩과 기록사항 일체가 그의 손자인 李實淵의 집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언흠(鄭彦欽)
字는 克明이고 본관은 청주로서 會圭의 아들이다. 고종 말년에 아버지가 의병장으로 전사하자 즉시 모든 준비를 하여 천릿길을 달려갔다. 고향 선영하에 정성껏 장사지내고 피눈물로 3년간을 통곡하니 모두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헌조(權憲祖) 1930~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효와 청환의 명문에서 성장하여 유가의 범절에 특출하였고 연제나 효도의 실천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부모님의 병 수발을 극진히 하여 아산재단효자대상 및 고려재단대상 등 8회에 걸쳐 효자상을 받았다. 그리고 한학에 잠심하여 많은 저작을 남기고 있다.


김필수(金苾洙) 1937~
본관은 광산으로 모부가 눈이 어두워 보행에 어려움이 많자 부인 趙蘭姬와 함께 항상 모시고 출입하였으며 조석 공양도 일일이 수저로 떠드렸으며 무슨 음식이 먹고 싶다고 하면 당장에 구해 드리기를 세상을 떠나기까지 하였다. 그 정성어린 효성이 알려져 1979년에 보화상(補化賞)을 받았다.


유원화(柳遠華)
본관은 진주다. 친병(親病)에 효성을 다하여 士林에서 포상하였다.
봉화문화원님이 2023-02-13 오후 12:10:00 에 작성하신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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