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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인물

봉화문화원게시판
  등록일 : 2023-02-13 | 조회 : 372 | 추천 : 0 [전체 : 13 건] [현재 1 / 1 쪽] [로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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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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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절 유행(儒行)
제 6절 유행(儒行)

                                                         * 봉화군사(2022)의 내용을 따름

이덕장(李德璋) 1482~?
字는 경부(慶簿)이고 본관은 경주로서 눌재의 아들이다. 장부의 기상으로 학문이 깊어 제자들의 교육에 많은 힘을 썼다.


금응상(琴應商) 1512~l577
字는 경옹(景翁)이고 호는 정성재(定省齋), 본관은 봉화로서 계문으로 학문연구에 잠심하였다. 또한 역동서원 건립시 음양으로 많은 힘을 기울였다.


금봉서(琴鳳瑞) 1538~l606
字는 경류(景休)이고 호는 응휴(應休) 본관은 봉화로서 동래공의 후이다. 계문으로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다.


송경서(宋慶瑞) 1538~l601
字는 화응(和應)이고 본관은 여산으로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고 행금이 돈독해 사림의 추앙을 크게 받았다.


박경(朴璥) 1572~1654
字는 율포(栗甫)이고 호는 동천(東川)이다. 본관은 무안으로 광해군 때 향인 12명이 이이첨의 무리에 속하여 동지들과 같이 기천에 모여 후원하려고 公을 맞으니 公은 모르고 가서 술이 한 순배 돌고 네 자리가 다 각각 은어로 公을 풍자하니 公이 응수하여 '서수가'를 지어 보내니 모두 실색하였다. 문집이 간행되었다.


변유해(邊有海) 1608~?
字는 대이(大而)이고 본관은 원주로서 백산의 손자이다. 성리학 연구에 전심하고 후진양성에 생애를 바쳤다. 문망이 대단히 높았다.


변상훈(邊尙勳) 1678~?
字는 원백(元伯)이고 호는 수은당(睡隱堂) 본관은 원주로서 만취당의 후이다. 독지역학 하여 유가의 규범을 지키며 후학들에게 권선, 효제, 충신의 본을 지도하여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김일(金鎰) 1561~1637
字는 이중(而重)이고 호는 회헌재(暗軒齋) 본관은 의성이다. 영권의 현손으로 학문에 잠심하여 성리심서(性理深書)를 저술하였다.


권상현(權尙賢) 1590~l630
字는 재보(齋甫)이고 호는 북창헌(北窓軒)이다.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증손이다. 선조의 유훈을 지켜 학문을 닦고 여러 문사들과 교유하였고 지극한 숭조정신은 정우복 외 만인이 감동하였다.


금운달(琴雲達) 1624~l696
字는 우경(虞卿)이고 호는 누암(樓岩)이다.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고 학문 또한 깊어서 추앙을 받았다.


금취규(琴聚奎) 1627~l694
字는 문휴(文休)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은(𨏈)의 後이다, 천성이 환담(歡談)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에 힘썼다.


권홍(權霐) 1626~1699
字는 택원(澤遠)이고 호는 선암(仙巖)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광해혼조로 관직을 멀리하고 탑평 선암대상(仙巖臺上)에서 시와 풍류로 은사의 기풍을 지키니 마치 죽림칠현과 같다고 하였다.


금이해(琴以諧) 1632~l712
字는 화지(和之)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윤선의 증손이다. 평생 의관을 단정히 하고 독서에 임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금무달(琴武達) 1636~l677
字는 의경(毅卿)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원복의 후,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삼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후진을 길렀다.


박시천(朴施天) 1641~?
字는 백맹(伯孟)이고 호는 양간당(養間堂)이다. 본관은 무안으로서 수서의 증손, 경사에 통달하여 문장으로 추종을 받았다. 그리고 문집이 간행되었다.


금봉래(琴鳳來) 1641~l723
字는 휴세(休世)이고 호는 북촌(北村) 본관은 봉화로서 몸소 법도를 잘 지키면서 학문에 전념하여 사림의 추종을 받았다.


전시천(全是天) 1647~l699
字는 부여(賦予)이고 호는 격양당(擊壤堂)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四書六經을 근본으로 하여 漢, 唐, 宋, 諸子에 두루 연구하느라 철과 밤낮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 저서로는 격양집 12권이 전하고 있다.


이태춘(李泰春)
호는 壽村이다. 위풍이 당당하고 학구파로 저서에 壽材集이 발간되었다.


이인유(李仁游) 1639~?
호는 월담(月潭)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권두익(權斗翼) 1651~l725
字는 익경(翼卿)이고 호는 서설당(瑞雪堂) 본관은 안동으로서 송암의 증손이다. 학문과 행의가 하당 창설과 더불어 빛나고 유고가 있다.


금봉휘(琴鳳輝) 1636~l712
字는 휘세(輝世)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梧의 후이다. 무유재(無猶齋), 식호당(式好堂)이라는 간판을 걸고 형제간의 우애를 가일층 높이 올렸다. 또한 학문이 깊어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강찬(姜酇) 1647~l739
字는 자진(子鎭)이고 호는 성건재(省愆齋) 본관은 진주로서 잠은의 후이다. 윤명제 문인으로 특히 예문학을 깊이 연구하여 사림의 사표가 되었으며 저서로는 예설 성건재집이 간행되었다.
이 완(李 琓) 1651~
字는 수언(粹彦)이고 호는 구애(龜雇) 본관은 전주로서 시항의 자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깊다. 이기설을 깊이 연구한 바 있어 갈암이 공의 논리가 퇴계의 유지와 같았다고 하였다. 공(公)과 모산, 하당, 창설을 川城四老라 하였다. 저서로는 구애집이 간행되었다.


김홍제(金弘濟) 1661~l737
字는 도겸(道兼)이고 호는 북벽(北壁) 본관은 선성으로서 오수의 종질이다. 절조가 있고 기개가 높은 학자로서 관직에 나아갈 것을 단념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사림의 사표로서 중망이 높았다. 저서로는 북벽집이 간행되었다.


박천주(朴天柱) 1674~1717
字는 석문(石文)이고 호는 낙재(樂齋) 본관은 무안수서의 후로서 학문이 깊고 효도와 우애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권윤석(權胤錫) 1648~1717
字는 뇌이(賚爾)이고 호는 병촉재(秉獨齋) 본관은 안동이며 성오의 손이다. 사비(私費)로 안동 권씨 辛巳譜를 간행했다.


권두위(權斗緯) 1656~1732
字는 중장(仲章)이고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안동으로서 창설재의 동생이다. 학문이 뛰어나 32세에 옥산서원장을 했다. 저서로는 通書正蒙 皇極諸書洐義가 있다.


권두응(權斗應) 1656~l732
字는 문징(文徵)이고 호는 대졸자(大拙子)이다. 본관은 안동, 하당의 막내아우이다 어려서부터 글씨 솜씨가 뛰어났고 학행 또한 곁들여 문장명필이었다. 석천에 초서로 '靑霰洞天'이 바위에 써서 새겨져 있다. 유묵으로는 靑霰洞天草額 石泉亭讀易齋, 仙巖屛帖과 대졸자 유고가 남아 있다.


금덕여(琴德與)
字는 경지(敬之)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문곡의 후이다. 일생을 책과 벗삼았다.


금희규(琴僖圭) 1662~l711
字는 기서(璣瑞)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항상 4서 3경을 강론하였다.


금사경(琴思敬) 1677~l737
字는 여직(汝直)이고 호는 신제(新齋)이다. 본관은 봉화로서 輔의 현손, 주자학과 퇴계서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금약사(琴若思) 1686~l742
字는 엄고(儼苦)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尙絃의 후이다. 조정의 당쟁시비를 상소하다가 귀양 가서 세상을 떠났다.


금양심(琴養心) 1685~
字는 여용(汝涌)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어 가법을 잘 지켰다.


금형옥(琴衡玉) 1742~
字는 성재(聖在)이고 호는 나월산옹(蘿月山翁)이다. 본관은 봉화로서 학문이 고매하였다.


김지항(金至恒) 1662~l735
字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정수당(靜睡堂), 본관은 안동이다. 영조 무신란 때 아계(丫溪) 金鏡과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박명종(朴明鐘)
字는 준문(濬文)이고 호는 광천(廣川), 본관은 무안으로서 수서의 후이다. 배움에 부지런하여 뜻을 이루었고 청렴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四書疑義가 전한다.


권보(權莆) 1681~1715
字는 효상(孝祥)이고 호는 겸와(謙窩)이다. 본관은 안동으로서 하당의 아들이다. 학문연구에 잠심하였고 후학을 훈육함이 엄격하여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나왔다. 저서로는 겸와집이 간행되었다.


이인부(李仁溥) 1665~l737
호는 월포(月浦)이고 본관은 전주로 虛直公의 사랑을 많이 받아 의로운 법도를 배워 생활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이인적(李仁積) 1675~l737
字는 여행(汝行)이고 호는 명청(明淸)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時善의 손자이다. 戊申年 의병을 인도하는 도감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으며 학문 또한 깊었다.


배상열(裵相說) 1759~l789
字는 군필(君弼)이고 호는 괴담(槐潭), 본관은 흥해로 백죽당의 후이다. 대산문인으로 천문, 지리, 을서, 역학에 정통하여 혼천의(渾天儀), 천체주위도(天軆周圍圖), 일월12회도(日月十二回圖) , 일장칠윤도(一章七潤圖), 천회도(天會圖)를 만들었고 저서로는 괴담집, 통학육도(通學六圖), 화계쇄록(畵計瑣錄) 등이 있고 천기측정기구(天氣測定器具)도 보존되어 있다.


송택성(宋宅星)
본관은 여산으로서 문망이 있었다.


박기태(朴基泰) 1839~1914
字는 성첨(聖瞻)이고 호는 야사(埜戺)이며 본관은 영해로 학림의 후이다. 기품이 당당하고 뜻이 바르며 학문이 역상도설(易象圖說)과 정율여지수(精律呂之數)를 해석하였으며 태극도를 그렸다.


신모(申模) 1749~1798
字는 문즉(文則)이고 호는 몽희와(夢羲窩), 본관은 평산으로서 문사와 필법이 뛰어나 사림의 추앙이 높았다.


전만웅(全萬雄) 1651~1683
字는 군준(君俊)이고 호는 원산(源山), 호군 시석의 아들로서 뜻이 크고 배움에 부지런하여 제자들을 많이 길렀다. 저서로는 원산집이 발간되었다.


권사부(標思溥)
호는 국헌(菊軒)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창설제의 증손이다. 풍모가 준절하고 학행이 뛰어나 타인으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았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전광흠(全光欽)
호는 도와(堵窩)이고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사림으로부터 추존을 크게 받았다. 저서로는 도와집이 전한다.


김담(金儋)
호는 북창거사(北窓居士)이다. 인현왕후 폐출 때 항소하고 무신년에 창의(倡義)하여 인망이 두터웠고 학문 또한 깊었다.


김추(金錘)
호는 성산(星山)이다. 성품은 엄정하고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저서로는 성산집이 있다.


전수동(全秀東)
字는 진일(震一)이고 호는 龜庵,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문장과 덕망이 높았다.


김굉(金鋐)
호는 청량(晴筤)이고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모직 초야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금성조(琴聖操) 1686~
호는 매계당(梅溪堂)이고 동래공의 후로서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고 행실이 올발라 배울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으나 하나같이 지도하여 모두들 훌륭하였다. 저서로는 청량집이 간행되었다.


이지(李指)
항상 밖을 나가지 않고 뜻을 가다듬어 오직 학문만 연구하였기에 세상 사람들이 은덕군자(隱德君子)라 하였다.


김세동(金世錬)
字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소암(素庵) 본관은 선성으로서 백암의 후이다. 대산의 제자로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소암집이 전한다.


김익동(金翼東)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학문이 깊고 행동이 타에 모범이 되어 세상이 단사부자(丹砂夫子)라 일컬었다.


김행동(金行錬)
본관은 선성으로서 백암의 후이다. 뜻이 깊고 굳어 학문으로 성공하겠다고 초야에서 열심히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이개(李慨) 1685~1737
字는 백평(伯平)이고 호는 광풍자(光風子) 본관은 전주로서 학행과 덕망이 뛰어났다.


권익전(權益銓) 1781~l836
字는 여량(汝良)이고 호는 용담(龍潭) 본관은 안동으로서 문행이 있고 鄕約節目을 지었다.


권재황(權載璜) 1783~l836
字는 명원(鳴遠)이고 호는 약암(約庵)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뛰어나 유고가 있다.


권재홍(標載弘) 1784~l835
字는 맹원(孟遠)이고 호는 죽와(竹窩) 7세에 부친이 별세하자 모친이 뒤를 따르고자 하매 손수 어머니께 미음을 권하되 어머니가 한 술 들면 자신이 한 술 먹고 두 술 들면 두 술 먹었다. 다섯 가지 箴言을 지어 지켰다.


김홍재(金弘載)
호는 창호(蒼湖)이다. 열심히 노력하여 향토문학진홍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영응(金永膺)
본관은 선성으로서 문학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으며 유고가 있다.


전수형(全秀衡) 1800~l869
字는 응일(應一)이고 호는 정묵제(靜黙齋)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제자들을 많이 육성하였고 유고가 있다.


강명규(姜命奎) 1801
字는 세응(世應)이고 호는 유계(柳溪) 본관은 진주로서 배우고 가르침이 부지런하여 선비로서 이름이 높았고 저서로는 세옹집이 전한다.


전종한(全宗翰) 1821~1871
字는 덕소(德昭)이고 호는 육유제(六有齋)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며 학행이 높아 유고가 전한다.


권재륜(權載綸) 1785~l844
字는 성능(聖能)이고 호는 소헌(疎軒)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학문이 넓고 정결하여 유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소헌집이 간행되었다.


이모(李模)
호는 삼취와(三取窩)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추만의 후이다. 집안일을 잘 이어받아 학문에 많은 진전을 가져와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권응규(權應揆) 1699~l767
字는 만원(萬源)이고 호는 노암(魯庵) 본관은 안동으로 학행과 덕망이 높으며 저서로는 尊敬錄이 전한다.


권정붕(權正朋) 1711~l763
字는 평경(平卿)이고 호는 백양(白陽) 본관은 안동으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사림의 추앙을 크게 받았다. 저서로는 백양집이 전한다.


이채(李彩)
호는 심수(沁水)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時善의 증손이다. 집이 가난한데도 마음을 편안히 갖고 오직 책읽기에만 정력을 기울였다.


권덕하(權悳夏)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효도와 우애가 깊었고 의상이 고결하고 글씨를 잘 썼다. 또한 학문에도 심도가 있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이두현(李斗顯)
호는 난헌(蘭軒)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학문에 잠심하였으며 저서로 자성사십목(自省四十目)을 전하고 있다.


김양후(金養厚)
宇는 자화(子和)이고 호는 독암(櫝巖) 본관은 의성으로 황파의 후이다. 문예에 크게 성취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다. 저서로는 독암집이 전한다.


이정현(李鼎顯)
호는 구현(龜峴)이고 본관은 전주로 학문이 깊었다.


김구한(金九翰) 1771~l837
字는 사겸(四兼)이고 호는 누은(陋隱) 본관은 의성으로 황파의 후이다. 평생 독서를 생활화하였으며 특히 천문문학을 연구하여 열성도(列星圖)를 만들었다.


권재성(權載成) 1778~1838
字는 성원(聲遠)이고 호는 서포(西圃)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사후에도 매일 사당에 전배하고 학업에 부지런했다. 저서로는 오성설(五性說), 강규설(講規說), 선현행실록(先賢行實錄)과 서포문집이 있으며 당송팔자백선(唐宋八字百選), 한문(韓文), 구문(歐文), 책술(策述) 등 유묵이 있다.


이경현(李綱顯)
호는 곡촌(谷村)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완의 증손이다. 스승인 선암의 학덕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림의 중망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곡촌집이 간행되었다.


권행하(權行夏) 1815~1855
字는 시중(時仲)이고 호는 아산(鵝山)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40여 년을 문수산 아래 아치실에서 띄집을 짓고 저술과 독서에 전념하여 아산팔곡(鵝山八曲)을 지었다. 저서로는 아산집이 6권 3책, 상변집요(常變輯要) 4권 2책, 상변요람(常變要覽) 4권 2책, 선사록(善師錄) 1책이 있고 유묵으로는 일과정력(日課程歷) 1책, 이정서(二程晝) 1책이 있다.


유세흠(柳世欽)
호는 운고(雲皐)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진일제의 후이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이치정(李致楨) 1781~l853
字는 사흥(士興)이고 호는 명와(明窩) 본관은 전주로서 공명심이 강하고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회갈헌치형(懷葛軒 致馨) 일암치적(逸庵致迪)과 더불어 풍정삼군자(楓井三君子)라 하였다.


이치휴(李致休) 1792~l871
호는 사언(士彦)이고 호는 복제(服齋) 본관은 전주로서 성품이 온후하며 문장이 뛰어났다. 송월제가 미완성한 역대사선(歷代史選)을 백씨 명와와 함께 네 편으로 완성하고 문중에 충, 효, 열의 사적을 재정립하여 이씨삼강록(李氏三綱錄)이라 이름하여 ‘忠悌忠信禮儀’의 六字大義라 하여 평생 배에 차고 살았다.


이치적(李致迪) 1776~l852
학행이 뛰어나 회갈헌, 명와와 일문삼풍(日門三風)이라 하였다. 만년에는 주서를 좋아하여 산학에 비중을 두어 집경청업자(執經請業者)에 상세히 하여 인심을 얻었고, 자산 권재옥과 같이 신필만주(信筆挽誅)의 책을 여러 편 발간하였다.


전병열(全秉烈) 1813~1887
字는 덕언(德彦)이고 호는 우직(愚直)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우직정을 지어놓고 계급을 가리지 않고 문맹자 일소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치형(李致馨) 1775~l847
字는 중덕(仲德)이고 호는 회갈헌(懷葛軒) 본관은 전주로서 추만의 후이다. 현융원지문(顯隆園誌文) 및 임자연설(壬子筵說)을 통독하여 그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회갈(愼葛)’이란 두 글자를 거실 이름으로 하니 도정절(陶靖節)을 뜻하고 있다고 하였다.


전종주(全宗周) 1823~l880
字는 덕윤(德潤)이고 호는 무유재(無猶齋) 본관은 옥천으로 야옹의 후이다. 문장과 덕망이 높았고 유고가 전한다.


금양순(琴養純) 1752~l833
字는 선오(善吾)이고 호는 나월산재(羅月山齋)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농은 이급(李級)에게 배워 학문이 깊어 사우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 문집이 간행되었다.


금당(琴讜)
본관은 봉화로 元貞의 후이다 8세 때 모친상을 당해 집상행활이 성인효자도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극진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선비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창주시집(唱주詩集)이 전한다.


이상현(李相鉉) 1817~?
字는 정임(鼎任)이고 호는 만오(晩悟)이다. 본관은 경주로서 용재의 후이다. 기국이 중후하며 학문의 성취도가 빨랐으며 후학도 많이 길렀다. 저서로는 만오집이 발간되었다.


권기연(權琪淵)
호는 홍의암(弘毅庵)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悳夏의 아들로 학문을 통하여 벗을 잘 사귀었으며 우애가 지극하여 모두가 우러러 보았다. 또한 효도를 하는 데는 부모에게 추호의 거리낌도 없이 하였다. 저서로는 홍의집이 간행되었다.


전규명(全奎明)
호는 直山이고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며 우직공의 아들이다. 일찍이 공명과 이기심을 버리고 오직 선행으로 일관하여 제자들이 많이 따랐다.


김우한(金遇翰)
호는 도은와(陶隱窩)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황파의 후이다. 어버이께 효성이 지극하였고 주위에 어려운 사람을 극력 보살피며 가르침이 후덕하였다.


김노수(金魯銖) 1829~l914
字는 도일(道一)이고 호는 감주(感宙)이다.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로 시문에 특히 능하여 시집과 감주집을 간행하였다.


김직수(金直水)
호는 고우(古愚)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참판 갈천의 후이다. 뜻을 모아 배움에 힘써 제자들을 많이 길렀다. 저서로는 고우집이 전한다.


김호영(金浩永) 1831~l914
字는 원직(元直)이고 호는 일춘재(日春齋)이다.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경술국치 후 일본이 은사금(恩賜金)이라고 주니 받지 않고 꾸짖었다. 학행과 덕망이 높아 유고가 있다.


김효영(金孝永)
호는 성환(惺寰)이고 왜놈의 만행을 상소하여 귀양을 갔다가 6년간의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도학은 일순도 놓은 일이 없었다. 유고가 있다.


김병집(金炳潗) 1832~1894
字는 찬오(贊五)이고 호는 수헌(守軒)이다. 본관은 안동으로서 구전의 후이다. 저서로는 유고가 남아 있다.


김재윤(金載輪) 1846~l920
字는 성여(聖與)이고 호는 삼은(三隱)이다. 본관은 의성으로서 황파의 후이다. 선비로서 행실을 엄정히 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다. 저서로는 삼은집이 전한다.


배선영(裵善榮) 1852~1930
字는 義五이고 호는 乃山이다. 본관은 흥해로서 유산의 10대손이다. 용의가 고결하고 단아한 성품으로 경서와 성리학에 매진하였다. 유고가 전한다.


권상한(權相翰) 1853~l927
字는 충일(沖逸)이고 호는 간은(艮隱) 본관은 안동으로 학행이 뛰어나 가은집이 있다.


배선규(裵善奎) 1861~1938
字는 瓚五이고 호는 川南 본관은 흥해이다. 유산의 10대손이며 용자가 수려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학문에 매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이수춘(李壽春) 1861~l939
字는 국첨(國瞻)이고 호는 기수(沂叟)이다. 본관은 진성으로 온계의 후이다. 국운이 기울어 출사의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특히 문방사우를 사람으로 하여, 즉 '붓'은 毛公 이름은 元, 字는 예경, 호는 유일와(唯一窩), 본관은 中山人 이렇게 하여 각기 문화에 끼친 활동상황을 기록하여 소설화하였다. 이 책 이름을 문선생전(次先生傳)이라 하였다. 또 문집 6책 13권이 발간되었다.


김세락(金世洛) 1854~
字는 문현(文顯)이고 호는 고암(古巖) 본관은 풍산으로서 학사의 후이다. 기국이 두텁고 깊고 넓으며 지조가 굳어 학문이 고매하였다. 저서로는 고암집 6권이 전한다.


김경연(金敬淵) 1856~1925
字는 성목(聖穆)이고 호는 명제(明齋) 본관은 연안으로 만취당의 11대손이다. 학행이 밝고 간결하면서 깊고 순수하고 덕행이 두터워 이학류선성학도(理學類選聖學圖)를 집설하였으며 유고가 있다.


권상익(權相翊) 1863~1934
字는 찬수(贊粹)이고 호는 성재(省齋) 또는 청산(晴山)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이기설에 대하여 ‘합이기론’을 제창하였고 또 道義추락을 바로잡기 위하여 예학을 연구 발전시켰다. 퇴폐한 조정에 출사를 단념하고 임천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삼계서원에서 향회를 개최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한국유림단의 파리장서운동과 독립자금모금운동, 중국대통령에 보낸 독립청원서 관계로 일경에 체포되어 달성감옥에서 많은 고초를 당하였다. 1968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포장이 추서되었고 저서로 성재문집 30권 15책이 전한다.


배동진(裵東進) 1866~l939
字는 德祖이고 호는 眉巖 본관은 흥해이다. 유산의 12대손, 늘 학문을 숭상하였다. 筆名이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겼다.


배선영(裵善榮) 1852~1930
字는 養五이고 호는 乃山 본관은 흥해로 유산의 10대손이다. 용의가 고결하고 단아한 성품으로 경서와 성리학에 매진하였다.


배선강(裵善綱) 1866~l905
字는 益三이고 호는 一柳 본관은 흥해로 유산의 10대손이다. 주경을 연구하여 당대의 선유였다. 공자 행단과 같이 露臺를 만들어 선비들과 상유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렀다. 유고가 전한다.


배선박(裵善博) 1867~l946
字는 學餘이고 호는 淸虛 본관은 흥해로 유산의 10대손이다. 完學보다 訓學을 重視하여 丹陽 呦鹿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청렴결백으로 선비의 道를 가일층 선수하였다.


박승후(朴勝厚) 1857~1920
字는 경재(敬載)이고 호는 만포(晩圃) 본관은 반남으로서 낙한정의 후이다. 사림으로부터 추앙을 크게 받았으며 유고 2책이 전한다.


김병학(金炳學) 1863~1908
字는 성학진(聲學振)이고 호는 매사(梅史) 본관은 안동으로서 구전의 후예이다. 성질은 단아하고 지학에는 민첩하여 특히 경서와 시에 능하였으며 행신에 추호의 오점이 없어 덕망이 높았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김옥연 (金玉淵)
호는 해양(海陽)이고 천재인데 오직 학문연구에만 전심하였다.


변태균(邊台均) 1867~?
字는 국형(國衡)이고 호는 만와정(晩窩亭) 또는 桂山, 본관은 원주로서 만취당의 후이다. 특히 주자학에 정진하여 제자들에게 심도 있게 주지시켰다. 저서로는 만와집을 비롯하여 중용의의(中庸疑義) 소학강의(小學講義) 주퇴서요록(朱退書要錄) 서산제기문록(西山齋記聞錄) 등이 전한다.


권상원(權相元) 1862~l945
字는 순팔(舜八)이고 호는 정산(靜山) 본관은 안동으로서 문장에 능하며 덕망과 기국이 깊어 당대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춘양에 은거 중 파리장서에 참여 국권회복에 앞장섰으며 유고가 있다.


흥치유(洪致裕) 1879~l946
字는 응원(應遠)이고 호는 겸산(兼山) 본관은 남양으로서 두곡의 후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명성황후 시해 후 의병대장 이강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고 국치 후 남양주에 지곡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많이 길렀다. 저서로는 겸산문집이 전한다.


전재수(全在銖) 1870~1939
字는 순칠(舜七)이고 호는 회산(悔山)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다. 약관에 중용을 깊이 이해하여 처신에 더욱 신중하여 사림의 촉망을 받았다. 저서로는 유고가 전한다.


권상규(權相圭) 1874~1966
字는 치삼(致三)이고 호는 채산(蔡山) 만호(晩號)는 인암(忍庵) 본관은 안동 충재의 후이다. 天姿가 도에 가깝고 기국이 준정하고 박학강기로 고명한 식견과 높은 문장은 당시 유림의 거두로 태산북두라고 추앙을 받았다. 혼탁한 세상을 개탄하여 임천에서 깊이 숨어 주정학을 연구하고 오로지 '忍' 한자로 80년간 덕을 닦으니 문하에 사람이 늘 끓었고 배우러 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특히 공의 글은 없는 곳이 없었다. 저서로는 문집 12권, 동국사략 6권, 경제사의(經濟私議) 등이 전한다.


권욱연 (權頊淵) 1880~l959
字는 자신(子愼)이고 호는 소곡(素谷)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후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의리가 대단했다. 경학에 밝고 문사가 엄정하여 언행이 바르고 효우가 독실했다. 특히 역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평생 일기를 쓰고 평생 초하루와 보름에 꼭 성묘를 했다. 저서로는 소곡문집 외에 국가변혁사 인리경조사(隣里慶弔史) 기타 다수가 있다.


이수화(李洙和) 1873~1956
字는 성관(聖觀)이고 호는 색산(索山) 본관은 진성으로서 노송정의 후이다. 지학의 나이에 경사를 통달하였고 제자백가를 두루 연구하였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여 시편과 색산문집(索山文集)이 전한다.


박용택(朴龍澤) 1877~1958
字는 경춘(景春)이고 호는 취암(醉菴) 본관은 무안으로서 수서후이다. 영남 선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효성과 우애가 또한 지극하여 백방 호걸이라 칭송하였다. 저서로는 취암집 2책이 간행되었다.


권상용(權相用) 1881~1956
字는 은필(殷弼)이고 호는 옥전(玉田)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학문은 물론 경서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고 효행이 지극하며 형제간 우애가 또한 대단하였다. 재주가 비상하여 여헌(旅軒)의 서원에서 현판 글을 한번 훑어보더니 10년 뒤에 방문하여 다 외웠다. 길을 떠날 때는 꼭 책을 들고 다녔으며 의문이 생기면 누구에게도 물음에는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다. 저서로는 옥전집이 전한다.


김홍기(金鴻基) 1884~1954
字는 순우(順遇)이고 호는 만창(晩蒼)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이다. 심산 김창숙과 제휴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한국유림단을 통해 모금운동에 참여하였다. 1977년 8월 15일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만창집 8권 4책 전한다.


배동준(裵東駿) 1885~1978
字는 國現이고 호는 奉庵 본관은 흥해로서 유산의 12대손이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제자백가에도 통달하였다.


권명섭(權命燮) 1855~l949
字는 성후(性厚)이고 호는 춘번(春樊)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7살 때 생일에 남들은 모두 생일날 경축이 되는데 나만 홀로 비통하게 맞는구려(人皆慶誕 日俄獨悲誕日)는 유명하다. 평생 학문을 연구하여 그 깊이는 바다 같고 무궁하기는 長江과 같았다. 파리장서 운동에는 심산 김창숙은 남부(南部), 공은 북부(北部)를 맡아 서명을 받는 데 앞장서다가 구속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장서를 갖고 파리로 가려다가 70 노모 때문에 심산이 대신 갔다. 상경하여 충재선생 사적을 베꼈으며 그가 지은 저작은 실로 방대하다. 춘번문집 12권 6책, 안동권씨가전 4책, 충재선생사적 5책이 전한다.


권상익(權相益) 1867~l954
字는 순겸(舜謙)이고 호는 수석(漱石) 본관은 안동으로서 문도의 현손이다. 학문도 깊고 글씨도 잘 썼다. 유고가 전한다.


권일섭(權一燮) 1885~1974
字는 회여(會汝)이고 호는 남고(楠皐)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이다. 책 한 권밖에 배우지 않았지만 오직 독학으로 박학다식하였다.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효행 또한 지극하였다. 음성과 모양을 보고도 성격과 장래를 예견했다. 본래 몸이 약했으나 섭생에 노력하여 90 향수를 하였고 저서로는 남고집이 간행되어 전한다.


김병모(金炳模) 1887~1957
字는 순여(舜汝)이고 호는 만운(晩雲) 본관은 안동으로서 구권의 후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김호규(金濩圭)
字는 순명(舜明)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눌재의 후이다. 학덕이 높았고 유고가 있다.


김헌진(金憲鎭)
字는 숙빈(叔斌)이고 호는 성우(性寓) 본관은 안동으로서 예학과 주서에 깊이 연구를 하였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최유함(崔有涵) 1569~1616
본관은 해주 면학에 근면하여 경서와 제자백가를 깊이 연구하였고 정인홍의 폐도정치의 상소로 투옥사 당하였다.


최장(崔檣) 1591~1627
본관은 해주이다. 엄부의 가훈을 잘 지키면서 실천궁행을 위주로 하여 생활하면서 잠심 호학하여 많은 유고를 남겼다.


홍유범(洪遊範) 1653~1732
字는 백윤(伯倫)이고 호는 기암(寄庵) 본관은 남양, 잠심 호학하여 추원록이 전한다.


홍시준(洪始準) 1790~1858
字는 평칙(平則)이고 호는 소려(笑廬) 본관은 남양이다. 독지역학하여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홍철후(洪哲厚) 1849~l923
字는 여명(貽命)이고 호는 만우(晩愚) 본관은 남양이다, 문장명필로 이름이 높아 유고가 전한다.


권적(權菂) 1660~1718
字는 聖功이고 호는 무은(霧隱) 본관은 안동이다. 효도와 우애와 학문이 빛났다.


김낙하(金樂夏) 1746~1795
字는 해형(海亨)이고 호는 초옹(樵翁). 본관은 의성, 潛의 후이다. 독지역학으로 노력하여 성취하고 후진양성에 힘을 썼다. 저서로는 초옹유가가 전한다.


이모(李模) 1669~?
字는 사범(士範)이고 호는 삼취와(三取窩) 본관은 전주로서 평생을 학문연구에만 일관하였다.


이중연(李重延) 1711~1794
字는 희원(希愿)이고 호는 누실(陋室) 본관은 진성, 난은의 손자로서 향시에 합격하였으니 우선 선비발명은 되었고 평생을 경서연구와 저작생활로 일관하여 유고가 전한다.


권두산(權斗山) 1676~1730
字는 사앙(士昻)이고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전한다.


권정방(權正方) 1712~1784
字는 직경(直卿)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학덕이 높아 유고가 전한다.


권정술(權正述) 1744~1770
字는 신초(愼初)이고 호는 청과재(淸寡齋) 본관은 안동으로서 학행이 있어 유고가 전한다.


권응도(權凝度) 1760~1790
字는 성여(成汝)이고 조는 정재(靜齋) 본관은 안동으로서 학행이 높아 유고가 전한다.


이중협(李重協) 1719~?
字는 덕승(德昇)이고 본관은 진성, 송재의 후로서 서벽 입향조이다. 산수가 좋아 난세의 안락처라 믿고 장암서당을 지어 학문연구와 제자를 육성하였다.


이중경(李重慶) 1724~1764
字는 지언(志彦)이고 호는 운재(雲齋) 본관은 진성이다. 난은의 손자, 영달에 초연하여 오직 학문연구의 외길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금성봉(琴成鳳) 1747~l792
字는 도여(道汝)이고 본관은 봉화 (𨏈)의 후이다. 학행이 높아 유고가 있다.


김홍서(金弘瑞) 1754~1839
字는 장서(長瑞)이고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의성, 황파의 후이다. 학문에 전 생애를 바쳤으며 많은 제자를 길렀다. 저서로는 聖學詳圖와 유고가 있다.


김희분(金熙奮) 1760~1822
字는 순수(舜叟)이고 호는 백산(白山)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현손이다. 조부 단사공의 유지를 받들어 문예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백산집이 전한다.


이치인(李致寅) 1758~1887
字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삼경(三卿) 본관은 전주로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이량(李梁) 1722~1760
字는 하숙(厦叔)이고 호는 귀후재(歸厚齋) 본관은 전주로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이원묵(李元黙) 1764~1801
字는 과우(寡尤)이고 호는 곡촌(谷村) 본관은 전주이다. 평생을 책과 자연과 친우를 사귀며 저작활동을 많이 하였다.


권기도(權基度) 1767~1836
字는 덕수(德叟)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전한다.


권신도(權身度) 1767~l851
字는 성위(聖爲)이고 호는 육유재(六有齋)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전한다.


권홍도(權弘度) 1789~1849
字는 군목(君穆)이고 호는 소은(素隱)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있다.


김희찬(金熙燦) 1772~1857
字는 경집(敬緝)이고 호는 습도제(習陶齊) 본관은 의성이다. 是權의 후이다. 정성을 학문연구에 기울여 제자들 육성에 전력하였다.


김재선(金在璿) 1773~1858
字는 치재(穉齋)이고 호는 문학재(文鶴齋)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후이다. 학문에 전력을 기울여 많은 제자를 길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이한중(李漢中) 1775~?
字는 백황(伯黃)이고 호는 녹문(鹿門) 본관은 진성, 난은의 현손이다. 시문에 능하여 천재시인이라 하였다. 지금도 분천 녹문산에 조대차구(釣臺茶具)가 있다.


이응인(李應寅) 1776~?
본관은 전주로서 義와 孝를 소중히 여겼으며 시에 능하여 시집이 전한다.


김재전(金在田) 1785~1858
字는 능견(能見)이고 호는 구정(鷗汀)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후이다. 예학연구에 힘썼으며 저서로는 四禮纂要와 유고가 있다.


김근수(金謹銖) 1791~1861
字는 신백(愼伯)이고 호는 사성와(四成窩)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후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금구탁(琴龜鐸) 1789~?
字는 경서(景瑞)이고 본관은 봉화이다. 천성이 근검하고 정밀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금성범(琴成範) 1790~1863
字는 우석(寓錫)이고 호는 농은(聾隱) 본관은 봉화로서 학문에 정진하여 많은 연구를 하였다.


금이탁(琴以鐸)
字는 경원(警遠)이고 호는 농와(聾窩) 본관은 봉화, 군위공의 후이다. 성품은 청순하고 학문연구에 부지런하여 유고가 있다.


권명하(權命夏) 1792~1832
字는 숙흠(叔欽)이고 호는 빙고(氷皐)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있다.


권방도(權邦度) 1798~1876
字는 대이(大而)이고 호는 두와(蠹窩) 본관은 안동이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책을 썼는데 孝悌錄 沖齋內外子孫錄 석천지(石泉誌)가 전한다.


권경연(權競淵) 1816~1870
字는 백임(伯臨)이고 호는 청하(靑霞) 본관은 안동이다. 경사에 박학하고 성품이 온후하였다.


안광표(安光表) 1805~ 1870
字는 경원(景元)이고 호는 눌와(訥窩) 본관은 죽산, 주례, 경서, 좌전, 화편등서를 요점을 따서 기록하여 총서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눌와집이 전한다.


안수학(安秀學)
字는 국언(國彦)이고 호는 백하(白下) 본관은 죽산, 청백강직하여 집에서 지킬 팔당지계와 밖에서 지킬 십물지경이 있어 조신에 역점을 두었으며 문집이 간행되었다.


변택형(邊宅馨) 1807~?
字는 덕원(德遠)이고 호는 치농(癡聾) 본관은 원주, 만취당의 후이다. 천성이 강직청고하여 유자로서 본분을 지켜 군자의 도를 행하였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변택구(邊宅九) 1817~1883
字는 경일(景一)이고 호는 省思齋 본관은 원주로 暹의 장자, 독지역학으로 학문연구에 정진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이택용(李澤龍)
字는 운증(雲徵)이고 호는 석거정(石居亭) 본관은 화산, 학행과 덕망이 있었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문규(李文奎) 1810~1884
字는 성휴(聖休)이고 호는 신포(薪圃) 본관은 우계, 시정에 맞추어 영리와 영예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행으로 선비들에게 명망이 높았다.


금정옥(琴廷鈺) 1814~l853
字는 성진(聖振)이고 본관은 봉화, 輔의 후이다. 학문에 연구가 깊어 저서가 있다.


금기만(琴基萬) 1830~1883
字는 석장(釋璋)이고 호는 국은(菊隱) 본관은 봉화, 尙絃의 후이다. 천성이 관후하여 학문은 물론 글씨를 잘 썼다. 문집이 있다.


금헌규(琴玉獻 圭) 1830~1901
字는 숙장(肅章)이고 본관은 봉화이다. 문행이 대단하여 사림의 추종을 받았다.


이석모(李錫模) 1815~1877
字는 경우(景禹)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글씨를 잘 써서 명망이 높았다.


이주연(李珠淵) 1820~1888
字는 시견(時見)이고 호는 늑재(肋齋) 본관은 전주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이석영(李錫永) 1825~1898
字는 세윤(世胤)이고 호는 계소(溪巢) 본관은 전주, 추만의 후이다. 소종(小宗)을 위해 歸厚楔을 만들고 후학을 많이 길렀다. 계소집이 전한다.


김백종(金百宗) 1815~1926
字는 기숙(氣叔)이고 호는 경학당(敬謔堂) 본관은 의성, 鎰의 후이다. 독지역학으로 문명이 높아 유고가 있다.


김휘수(金徽壽) 1823~1873
字는 덕조(德繰)이고 호는 노호(老湖) 본관은 의성, 학봉의 후이다. 경서에 능하여 훌륭하였다.


김재호(金載琥) 1824~l899
字는 희팔(羲八)이고 호는 눌암(訥巖) 본관은 의성이다. 주정학에 연구가 깊었고 제자를 많이 길렀다. 저서로는 눌암집이 전한다.


신석정(申錫鼎) 1822~1900
字는 형오(亨吾)이고 호는 白史 申在夏의 장자로 본관은 평산이다. 경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저서로는 白史集이 있다.


안사진(安思震) 1763~?
字는 시여(始汝)이고 호는 신덕제(新德齊) 본관은 죽산이다.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권중연(權重淵) 1830~1883
字는 사준(士濬)이고 호는 月室 본관은 안동, 두응의 후이다. 일찍이 문장이 되어 권학권자문을 지었다. 여기에는 우주만물의 근원, 자연의 이치, 인류의 始源, 문명의 역사, 궁리, 격물, 수신 등이 기록되어 그 가치가 높다. 그가 쓴 社約輯錄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천성향약의 제정과 발전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조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며 저서로는 문집이 3책 천자권학문, 사약집록과 유묵으로는 五子近思錄 등 수십 권이 전하는 근대의 큰 석학이다.


권복연(權福淵) 1832~1872
字는 원길(元吉)이고 호는 가암(可庵)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전한다.


권양하(權養夏) 1847~l909
字는 양수(陽叟)이고 호는 玉潤, 본관은 안동이다. 학문과 덕행이 높아 유고가 전한다.


권상경(權相璟) 1851~1933
字는 경옥(景玉)이고 호는 石翁 본관은 안동, 선암의 후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문장이 깊어서 士友들로부터 중망을 크게 받았다. 어려운 일은 명석하게 잘 처리하였고 가정에는 법도가 있었다. 유고가 전한다.


이치은(李致殷) 1834~1897
字는 경의(景義)이고 호는 백암(白庵) 본관은 전주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이규형(李奎炯) 1843~?
字는 치등(致登)이고 호는 태악(泰岳) 본관은 경주, 용재의 후이다. 義와 善이 아니면 하지를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몰두했다.


이오상(李五相) 1845~?
字는 준오(俊五)이고 호는 간포(澗圃) 본관은 진성이다. 학문에도 깊었지만 특히 시문에 능하였다.


강참(姜鑱) 1836~?
字는 주경(周卿)이고 호는 극재(克齋) 본관은 진주이다. 학행이 깊어 克齋집이 발간되었다.


강면영(姜冕永) 1836~1912
字는 주오(周吾)이고 호는 무이재(無貳齋) 본관은 진주이다. 학행이 출중하여 무이재집이 간행되었다.


강준(姜鋑) 1836~?
字는 학여(學汝)이고 호는 현봉(玄峯) 본관은 진주이다. 학행이 있었다.


금유열(琴維烈) 1838~1910
字는 사강(士綱)이고 호는 근암(謹庵) 본관은 봉화이다. 학문이 깊어 후진 양성을 하였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금구로(琴龜魯)
字는 자우(子佑)이고 호는 초당(草堂) 본관은 봉화이다. 처신이 엄정하고 효도와 학문이 대단하였다.


금기적(琴基績) 1835~1895
字는 경진(景進)이고 호는 성산(城山) 본관은 봉화, 군위공의 후이다. 학문이 깊고 도덕군자로서 유고가 있다.


금기찬(琴基纘) 1838~1896
字는 여장(汝璋)이고 본관은 봉화이다. 문예가 뛰어나 사우들의 중망을 받았다.


금주열(琴周烈) 1845~?
字는 사성(士聖)이고 본관은 봉화이다. 기질이 순박하고 경서를 깊이 연구하였다.


금덕연(琴德淵) 1855~1926
字는 성박(聖博)이고 본관은 봉화이다. 문예가 뛰어나 사우간에 추중을 크게 받았으며 유고가 있다.


금동열(琴東烈) 1872~1945
字는 국보(國普)이고 호는 성산(醒山)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북지서 태어나 효도, 우애, 신의, 덕을 중시하고 엄격히 처신하여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특히 필력은 퇴계 문하 세 명필 중 한 사람인 매헌의 맥을 이은 명필가이다. 저서로는 성산유고 8권, 국문소설 백안비와 가사류인 화전가와 공이 始筆하여 7인이 만든 한양가가 전하며. 유묵이 각처에 많이 남아 있다.


김난영(金蘭永) 1838~1911
字는 택형(宅馨)이고 호는 농산(聾山)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후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한일국치 이후 유림의 대표들에게 회유책으로 일본 왕이 전하는 은사금이란 것을 받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유고가 있다.


김재거(金載琚) 1841~1920
字는 경옥(景玉)이고 호는 가은(稼隱) 본관은 의성이다. 황파후 실학에 연구를 깊이 하여 농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고가 있다.


박현호(朴顯浩)
字는 문범(文範)이고 호는 몽산(夢山) 본관은 무안, 수서의 후이다. 세상의 이치를 살피는 능력이 깊었고 학행이 높아 제자를 많이 길렀다.


배한식(裵漢植) 1841~1908
字는 상삼(象三)이고 호는 하천(下泉) 본관은 성주로 안촌의 후이며 기국이 엄정하고 언행이 일치하였으며 분수를 잘 지켰고 학행이 깊었다.


전수영(全秀瑛) 1844~1924
字는 인숙(仁淑)이고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경사를 깊이 연구하여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전규진(全奎晉) 1855~1922
字는 국형(國亨)이고 호는 일산(逸山)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학문연구와 후진을 교육하였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김진석(金鎭奭) 1846~1907
字는 도언(道彦)이고 호는 격서(格西) 본관은 의성이다. 학당을 세워 많은 인재육성을 하였으며 유고가 있다.


김우규 1849~1926
字는 좌경(左卿)이고 호는 농은(農隱) 본관은 안동이다. 문망이 높고 덕행이 있었다. 유고가 전한다.


김재로(金載璐) 1850~1928
字는 성석(聖錫)이고 호는 백우(白愚) 본관은 의성, 황파의 후이다.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여 덕망이 높았다. 저서로는 백우집이 4책 발간되었다.


박지원(朴芝元) 1848~l885
字는 수여(秀汝)이고 호는 이산(二山), 본관은 영해로 澱의 후이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학문이 깊어 향포전(鄕褒典)이 있고 大蘭孝行집이 전한다.


박천흠(朴天欽) 1846~1912
字는 의약(義若)이고 호는 문산(文山) 澱의 후이다. 본관은 영해로 천품이 간결하며 효행이 출중하여 有鶴先知라는 詩句의 전설이 있다. 유고가 있다.


이영필(李英弼) 1848~1916
字는 경립(景立)이고 호는 지포(芝圃) 본관은 전주이다. 학문과 덕행이 높았다.


이종헌(李鐘軒) 1850~1918
字는 대전(大輾)이고 본관은 우계, 도촌의 후이다. 형우제공에는 모범이 되며 효행이 또한 뛰어났다. 만학으로 성공하였다.


이승기(李承驥) 1854~1932
字는 서익(瑞翼)이고 호는 소갈(小葛) 본관은 전주이다. 덕행이 뛰어났다.


강돈(姜鐓) 1848~?
字는 공부(公溥)이고 호는 매곡(梅谷) 본관은 진주이다. 학행이 높아 매곡집이 발간되었다.


강순원(姜舜元) 1850~1943
字는 성팔(聖八)이고 호는 이산(二山) 본관은 진주이다. 학문에 힘써 二山集이 전한다.


강수영(姜壽永) 1855~?
字는 복겸(福兼)이고 호는 회산(晦山) 본관은 진주이다. 학문에 잠심하여 회산집이 발간되었다.


권계연(權啓淵) 1852~1924
字는 자건(子健)이고 호는 회와(晦窩)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전한다.


권상형(權相衡) 1854~1894
字는 군보(君保)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문장이 빼어나 詩學大成 詩鶴林玉露, 南華經 외에 주옥같은 글씨와 유고가 전한다.


변종기(邊鐘基) 1854~?
字는 응칠(應七)이고 호는 준계(濬溪) 본관은 원주로서 5세 때 저작을 하였다. 진사 성종진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깊었다.


변시균(邊時均) 1875~?
字는 순화(舜華)이고 호는 취산(醉山) 본관은 원주, 만취당의 후이다. 省齋를 비롯하여 향내 대학자에게 수학하여 학문이 더욱 깊이가 있었다. 시국수습에도 앞장선 선구자이다. 저서로는 취산집이 전한다.


홍승우(洪承禹) 1854~1918
字는 계능(啓能)이고 호는 노석(老石) 본관은 남양, 두곡의 후이다. 저서로는 노석집과 만성보(萬姓譜) 20권 朝鮮與考 3권, 好須知家學 등이 전한다.


홍철유(洪澈裕) 1866~1962
字는 성대(聲大)이고 호는 성산(省山) 본관은 남양, 두곡의 후이다. 문장과 행실이 돈독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였다.


권재달(權載達) 1858~1940
字는 형오(亨五)이고 호는 대어재(大魚齋) 본관은 안동, 하당의 후이다. 시에 능하여 시집이 전한다.


권석연(權石淵) 1861~1917
字는 여형(汝衡)이고 호는 설초(雪樵)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전한다.


전규호(全奎昊) 1857~1926
字는 희약(羲若)이고 호는 묵엄(黙广)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꾸준히 학문에 정진하여 유고가 있다.


전규인(全奎麟) 1862~?
字는 공진(公桭)이고 호는 소우(小愚)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경서에 깊은 연구가 있어 후진을 지도했다. 유고가 있다.


금필규(琴弼圭) 1857~1927
字는 국현(國賢)이고 본관은 봉화, (𨏈)의 후이다. 뜻이 굳고 행실이 뚜렷하여 학문이 깊어 덕망이 높았다. 유고가 있다.


금병열(琴丙烈) 1859~1941
字는 은현(殷顯)이고 호는 회산(晦山) 본관은 봉화, (𨏈)의 후이다. 성품이 단아하고 학문이 해박하며 시집(詩集)과 晦山遺稿가 있다.


금석태(琴錫台) 1867~1915
字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백파(白坡) 본관은 봉화, 군위공의 후이다. 학문과 덕망이 높아 유고가 있다.


금성휘(琴聖徽)
字는 화숙(和淑)이고 호는 낙포(洛甫) 본관은 봉화로서 학행이 높았다.


금사신(琴思愼)
字는 경보(敬甫)이고 호는 나은(羅隱)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금영택(琴英澤)
宇는 재경(再卿)이고 호는 만우(晩寓)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로 학문과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김석림(金碩林) 1859~1941
字는 관여(寬汝)이고 호는 경암(絅庵)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후이다. 四禮要式을 편찬하여 어지러워가고 있는 사회 기풍을 바로잡았으며 몸소 실천하여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저서로는 경암유고가 전한다.


김석규(金石圭) 1865~1944
字는 보경(補卿)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평생을 학문연구에만 일관하여 사우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유고가 있다.


권국연(權國淵) 1863~1922
字는 자헌(自憲)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학행이 있어 유고가 전한다.


권근연(權瑾淵) 1866~1951
字는 응일(應一)이고 호는 창랑(蒼浪)이다. 본관은 안동으로서 학덕이 높아 유고가 전한다.


여대훈(余大勳) 1865~1941
字는 주욱(周郁)이고 호는 동은(東隱) 본관은 의령이며 초시에 합격했다. 그의 조상을 위하여 정산재를 지었고 배움에 부지런하여 학문연구에 적극성을 띠었으며 동은문집 上下가 있다.


유원립(柳元立)
호는 계당(溪堂)이고 형(炯)의 손자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예학에 밝아 향촌의 범절생활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저서로 유고가 전한다.


전수경(全秀璟) 1864~l942
字는 중경(仲璟)이고 호는 검산재(儉山齋)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시문에 능하였고 역학연구가 깊었다. 글씨를 잘 썼다.


전수기(全秀璣) 1868~1947
字는 형칠(衡七)이고 호는 아석(我石)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학업에 충실하여 문장에 능하였다. 또한 사회사업에도 크게 이바지하였고 유고가 전한다.


변태균(邊台均) 1867~?
字는 국형(國衡)이고 호는 만와정(晩窩亭) 본관은 원주로서 만취당의 후이다. 성실하게 학문을 연구하여 朱退學의 선구자라 일컬었다. 구양사를 창건하여 선조를 모시었고 저서로는 면와집, 中庸疑義, 小學講義, 朱退書要錄, 西山齋記聞錄 등이 전한다.


김상진(金尙鎭) 1868~1942
字는 계주(啓周)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호는 自樵로 학문이 깊어 유고가 있다.


김장호(金章鎬) 1868~1909
字는 국윤(國胤)이고 호는 애은(厓隱) 본관은 의성, 황파의 후이다. 성리학자로 문예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고가 있다.


김진호(金進鎬) 1868~l925
字는 주흥(周興)이고 호는 구사헌(九思軒) 본관은 의성, 황파의 후이다. 생애가 학문연구였고 또 후진을 위해 봉산이사를 수축하여 교육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금기익(琴基益) 1871~l953
字는 도겸(道謙)이고 호는 채운당(砦雲堂) 본관은 봉화이다. 학문에 전념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금석칠(琴錫七) 1874~1939
字는 문현(文顯)이고 호는 강운(江雲) 본관은 봉화이다. 충효로 조상의 뜻을 받들어 士林의 뜻을 모아 유계를 형성하였다.


금하규(琴夏圭) 1874~?
字는 공우(公寓)이고 호는 백산(白山) 본관은 봉화이다. 행실이 착하고 학문에 성실하여 유고가 있다.


전재석(全在錫) 1872~1946
字는 윤여이고 호는 병암(屛巖)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뜻이 깊고 성품이 강직하여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유고가 있다.


전사현(全泗鉉) 1883~?
字는 성방(聖邦)이고 호는 도간(陶澗)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二五논설과 성리학을 많이 연구하였다. 또한 灘口는 六洲라 정의하였고 문장과 필명이 높아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강필원(姜弼元) 1874~1943
字는 원필(元弼)이고 호는 작산(芍山) 본관은 진주이다. 풍모가 뛰어나고 학행이 높아 작산집이 발간되었다.


강주원(姜冑元) 1880~?
字는 율승(栗承)이고 호는 유운(柳雲) 본관은 진주이다. 학행이 높았다.


강순희(姜順熙) 1898~?
字는 성문(聖文)이고 호는 학천(鶴泉) 본관은 진주이다. 학덕이 높아 학천집이 간행되었다.


금세락(琴世洛) 1785~1847
字는 성도(聖道)이고 호는 취산(醉山) 본관은 봉화이다. 학문이 깊어 사림이 추앙하였다.


금정규(琴正圭) 1878~?
字는 평수(平叟)이고 본관은 봉화이다. 학문이 깊고 덕망이 있어 시편과 유고가 있다.


금복규(琴復圭) 1878~?
字는 성삼(聖三)이고 호는 기산(箕山) 본관은 봉화이다. 시문에 능하여 시편이 전한다.


홍의호(洪宜浩) 1887~1952
字는 직경(直卿)이고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남양이다. 일생동안 책만 읽어 연구가 많았다.


홍사인(洪思麟) 1891~1979
字는 시약(時若)이고 호는 남농(南農) 본관은 남양, 두곡의 후이다. 시문에 능하여 시편이 전한다.


홍종익(洪鐘益) 1899~1982
字는 경국(敬國)이고 호는 농산(聾山) 본관은 남양이다. 한문수학에 전념하였다. 그 후 문맹퇴치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김도진(金道鎭) 1877~1951
字는 계은(啓殷)이고 호는 소계(小溪) 본관은 안동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독창적인 학설을 세웠다. 유고가 전한다.


김뇌식(金賚植) 1877~1935
字는 은필(殷弼)이고 호는 남호(南湖)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후이다. 상해임정 군자금 모집시 전 재산을 저당하여 충당하였고 광복 후 건국 표창을 받았으며 학문연구가 깊어 많은 유고를 남겼다.


박인수(朴寅秀) 1878~?
字는 문백(文伯)이고 호는 대현재(大峴齋) 본관은 무안, 수서의 후이다. 유허비가 세워졌으며 문집이 간행되었다.


박연덕(朴淵悳) 1882~1949
字는 원대(源大)이고 호는 문남(文南) 본관은 영해, 학림의 후이다. 기품이 순후하고 예학에 연구가 깊어 예설집이 전한다.


김영도(金永燾) 1878~1958
字는 응백(應伯)이고 호는 학은(鶴隱) 본관은 광산, 습독공의 후이다. 학문이 깊었고 효행이 지극했다. 二宇堂을 설립하여 후진의 교육장으로 사용하였다.


김태종(金泰鐘) 1879~1958
字는 응원(應遠)이고 호는 수곡(修谷) 본관은 의성, 鎰의 후이다. 물야 북지화동(禾洞)에 수곡서당을 지어 학생을 지도했다. 수곡집이 있다.


이직필(李直弼) 1860~1922
字는 경이(敬而)이고 호는 백엄(白广) 본관은 전주로서 덕행이 높았다.


이승달(李承達) 1863~1942
字는 덕언(德彦)이고 호는 완리(莞里) 본관은 전주로서 학행이 높았다.


이재상(李齋相) 1863~1932
字는 원재(元哉)이고 호는 청두(靑杜) 본관은 전주, 오직 독서에만 전념 하였고 고종 승하 이후 계속 패리만 쓰고 살았다.


이교석(李敎錫) 1879~?
字는 우현(宇賢)이고 호는 청간재(淸澗齋) 본관은 진성이다. 백형 조몰(早沒)로 큰집을 잘 보살폈고 학문이 깊었다. 청간재집이 전한다.


이승탁(李承鐸) 1878~1953
字는 덕삼(德三)이고 호는 운암(雲庵) 본관은 전주,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이헌필(李憲弼) 1883~1957
字는 계장(季章)이고 호는 묵와(黙窩) 본관은 전주, 학문과 덕행이 높았다.


금병현(琴秉鉉) 1880~1958
字는 순오(舜五)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금석규(琴錫奎) 1884~1953
字는 응칠(應七)이고 호는 오산(梧山) 본관은 봉화, 군위공 후, 효도와 우애가 깊었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금성열(琴星烈) 1885~1964
字는 응칠(應七)이고 호는 국산(菊山), 본관은 봉화, (𨏈)의 후이다. 학문이 깊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고 서당을 열어 많은 후학을 배출했다. 遺稿가 있고, 學契가 있다.


김용호(金龍鎬) 1882~1974
字는 덕연이고 호는 지헌(止軒) 본관은 의성, 황파의 후이다. 학덕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지헌집이 전한다.


김영우(金永佑) 1885~1945
字는 중백(仲伯)이고 호는 반은(盤隱) 본관은 광산이다. 시문에 능하였고 성리서에도 연구가 깊어 유고가 전한다.


홍사국(洪思國) 1883~1969
字는 군일(君一)이고 호는 동호(東湖) 본관은 남양, 以成의 후이다. 經傳子集에 능통하였고 치산정훈이 훌륭하였으며 주정학에 잠심하여 유고가 전한다.


이준호(李俊鎬) 1902~?
字는 영로(英魯)이고 호는 영초(嶺樵) 본관은 경주로서 경서 연구에 성실하였으며 특히 예기에 밝았다. 先事도 잘 닦았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배계봉(裵啓鳳) 1885~?
字는 순서(舜瑞)이고 호는 아천(我泉) 본관은 성주로 안촌의 후이다. 정산 문하에서 배워 학문이나 덕행이 그 스승을 빼어 닮아 세칭 군자라 했다. 유고가 있다.


배훈식(裵勳植) 1885~1950
字는 계형(啓亨)이고 호는 현암(鉉庵) 본관은 성주로 안촌의 후이다. 자성이 활달하고 문예에 숙취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현암집이 전한다.


금서연(琴瑞淵) 1885~1963
字는 성원(聖源)이고 호는 동산(桐山) 본관은 봉화, 군위공의 후이다. 도의원(道議員) 재임시 농가 세금을 많이 감면시켰다.


금기찬(琴基粲) 1886~1933
字는 세명(世明)이고 호는 청남(聽南) 본관은 봉화로서 학문에 숙취하여 저서를 남긴 것을 외손인 權憲祖가 발간하여 반질하였다.


금회연(琴會淵) 1886~?
字는 원일(元一)이고 호는 농은(農隱) 본관은 봉화로서 학행이 엄정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금용대(琴鏞大) 1885~1919
字는 응원(應遠)이고 호는 낙운(洛雲) 본관은 봉화로서 예리하여 일찍이 학문에 숙취했다.


금석창(琴錫昌) 1879~1963
字는 천필(天弼)이고 號는 치석(癡石)이다. 본관은 봉화로서 천성이 강직하고 행실이 엄정하며 학문이 높았다.


금석찬(琴錫瓚) 1889~1961
字는 대유(大有)이고 호는 일암(一菴) 본관은 봉화이다. 문예와 학행이 사우간에 높이 추존되었으며 저서로는 一菴集이 전한다. 서당을 열어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유계가 있다.


금창섭(琴昌燮) 1891~?
字는 자극(子克)이고 號는 백하(白下)이며 인(軔)의 후이다. 영주 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변호원(邊鎬元) 1887~1959
字는 순좌(舜左)이고 호는 어은(漁隱) 본관은 원주로서 瀚 均의 자로 평생을 주퇴학 연구에 정진하여 많은 후진을 길렀다. 저서로는 어은집이 전한다.


사공찬(司空璨)
字는 사준(士俊)이고 호는 벽은(碧隱)이다. 지학의 나이에 경사를 통달 자아확충을 위해 독서와 산수를 벗삼아 임천에서 유연자적하였다. 유고가 있다.


정병주(鄭柄宙) 1889~1964
字는 경유(景裕)이고 호는 후소(後素) 본관은 봉화, 삼봉(三蜂)의 후이다. 경서에 능하면서 의서 연구를 많이 하였다.


정재기(鄭在麒)
字는 누성(䫫聖)이고 호는 서오(西塢) 본관은 봉화이다. 학행이 뛰어났다.


정지목(鄭之穆)
字는 치원(穉遠)이고 호는 백은(白隱) 본관은 청주이다. 경술학에 연구가 깊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권상경(權相經) 1890~1955
字는 정부(正夫)이고 호는 석당(石堂), 본관은 안동으로 천품이 탁월하고 문장이 조숙하였다. 독립운동기금모금운동에 앞장선 독립투사로 석당문집이 간행되었다.


금기재(琴基在) 1891~1964
字는 덕초(德初)이고 호는 담호(潭湖) 본관은 봉화이다. 학문연구에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금병헌(琴秉憲) 1898~1950
字는 장숙(章叔)이고 호는 후성(後惺) 본관은 봉화, 嵇의 후이다. 학문과 덕망이 높았고 유고가 있다.


금우현(琴宇鉉) 1904~1981
字는 명수(鳴叟)이고 호는 심일(心壹) 본관은 봉화이다. 군위공주손으로 학문과 글씨에 빼어났으며 고분가(叩盆歌)와 유고가 있다.


금성기(琴聲基) 1901~1973
字는 순가(舜可)이고 호는 운호(雲湖) 본관은 봉화, 은(𨏈)의 후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문사가 정박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글씨를 잘 썼으며 遺稿가 있다.


금석창(琴錫昶) 1901~1967
字는 창경(昶卿)이고 본관은 봉화이다. 문예가 뛰어나고 詩를 잘 지었다. 의술에도 능하여 많은 사람을 치료하였다.


금운낙(琴雲洛) 1903~1984
字는 건초(建初)이고 호는 운산한(雲山閒)이다. 학행이 엄정하였으며 후학 지도에 힘썼다. 學契가 있다.


금용국(琴容國) 1905~
대구지방법원판사, 변호사, 병산서원,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금칠현(琴七絃) 1905~
字는 성진(聲振)이고 松溪 軔의 후이다. 학문에 힘썼으며 구만서원(龜灣書院)을 복설하였다.


금동인(琴東麟) 1909~1985
字는 인서(仁瑞)이고 號는 운경(雲耕)이다. 동래부사(東萊府使) 휘(徽)의 후이다. 봉화향교 전교를 19년 역임하고 경북유도회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윤저(李潤著) 1891~1923
字는 경구(景龜)이고 호는 일우(一愚) 본관은 우계 ‘孝友’ 두 글자를 좌우명으로 하면서 자손까지 전하였다. 학문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저서로는 일우집이 간행되었다.


금철수(琴徹洙) 1912~
字는 홍경(弘卿)이고 號는 고산(古山)이다. 스스로 독학하여 학문이 뛰어났다. 古山유고가 있다.


이병섭(李炳燮) 1893~1959
字는 순익(舜溺)이고 호는 중계(中溪) 본관은 전주이다. 효우를 이어받아 학문도 깊었다.


권춘섭(權春燮) 1891~1954
字는 인경(仁卿)이고 하당의 후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평생 근면성실하게 살았다. 근숙여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에 힘썼고 한 마디 한 행동이 聖人隱者였다.


권동환(權東煥) 1894~1965
字는 덕양(德陽)이고 본관은 안동이며 성재의 아들이다. 대인군자의 덕성을 지니고 가학을 전승하여 문사가 뛰어났다. 고조(高祖) 이후 4대 12명의 문집이 났다.


김용규(金龍圭) 1892~1954
字는 운서이고 호는 번와(樊窩) 본관은 안동이다. 학문과 덕망이 높아 유고가 있다.


김극원(金克源) 1893~1964
字는 명로(明路)이고 호는 와은(臥隱) 본관은 의성, 황파의 후이다.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고 시문에 능했다. 저서로는 주역해의, 성리학해도, 와은유집이 전한다.


권중환(權中煥) 1895~1932
字는 윤극이고 호는 청관(聽觀) 본관은 안동, 의병대장 세연의 손자이다. 천품이 온후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일생을 통하여 나타내지 않는 참 선비다. 유고가 있다.


김응환(金應煥) 1894~1968
字는 은좌(殷佐)이고 호는 현사(玄沙) 본관은 의성, 팔오헌의 후이다. 교육으로 구국에 뜻을 두어 海文義墊을 세워 신문학을 지도하였다. 현사집이 8권 4책 전한다.


김진수(金晉秀) 1897~1986
字는 국삼(國三)이고 호는 동주(東州) 본관은 연안, 만취당의 후이다. 열심히 노력하여 경서에 통달하였다. 봉화, 영주, 안동 유계를 모아 문집 2책을 발간하였다.


송재식(宋在軾) 1898~?
字는 국형(國衡)이고 본관은 야성, 光心의 9대손으로 명호삼동에 학암서당을 지어 제자를 길렀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권노섭(權魯燮) 1899~1946
字는 덕부(悳夫)이고 호는 일헌(一軒) 본관은 안동, 相龍의 아들이다. 성품과 도량이 깊고 넓으며 근면하고 독실하기가 장자와 같았다. 일헌집이 발간되었다.


전영찬(全永粲) 1906~1987
字는 명국(明國)이고 號는 고와(顧窩), 본관은 옥천으로 야옹의 주손이다. 학행과 덕망을 겸비하였으며 많은 후학을 양성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顧窩集이 전한다.


배동환(裵東翰) 1906~1938
字는 봉견(鳳見)이고 호는 문일거사(文一居士), 본관은 흥해, 유산의 12대손이며 민족주의 사상가였다. 日新租合을 創設하여 相扶相助의 精神을 길렀다. 문맹퇴치 여성운동에 앞장을 섰다.


전우환(全堣煥) 1901~?
본관은 옥천으로서 야옹의 후이며 예서에 밝았다.


전중환(全重煥) 1904~1981
字는 순협이고 호는 우산(愚山)이며 본관은 옥천, 야옹의 후이다. 한문학에 능하였고 글씨는 당시 영남에서 제일인자라 하였다.


이승열(李承烈) 1909~1982
字는 무숙이고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전주이다. 경서에 몰두하여 유고가 전한다.


강 순(姜 錞) 1818~?
字는 미이(微而)이고 호는 죽취(竹醉) 본관은 진주이며 학행이 뛰어났다.


강 선(姜 鏇) 1819~?
字는 백전(伯田)이고 호는 백남(白南) 본관은 진주이며 학행이 뛰어났다.


박경배(朴景培) 1900~1924
字는 명여(明汝)이고 호는 운파(雲坡) 본관은 밀양이다. 자성이 온아하며 사서와 당송 8대 가서를 통독하였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저서로는 운파집이 전한다.


박천구(朴天球) 1658~1721
字는 명옥(明玉)이고 호는 낙천당(樂天堂) 본관은 무안, 수서의 후이다. 문장가로 특히 시를 잘 썼다.


김병석(金炳錫) 1905~?
본관은 안동으로서 한문학을 전수하여 시문에 능통하였다.


김은(金銀) 효종 때
字는 진원(振遠)이고 호는 사인와(思忍瀉) 본관은 선성이며 학행이 높았다.


김잠(金潛) 순조 때
字는 이소(而昭)이고 호는 학소(鶴巢)이며 본관은 선성으로 학문과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김영직(金永稷) 철종 때
字는 이와(而窩)이고 호는 양졸(養拙)이며 본관은 선성으로 문장이 뛰어났다.


김휘준(金輝濬)
字는 문숙(文淑)이고 호는 희재(希齋) 본관은 선성으로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저서로는 희재집이 전한다.


김광국(金光國)
字는 추백(樞柏)이고 호는 육인재(六忍齋) 본관은 광산, 쌍벽당의 후이다. 학문과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저서로는 육인재집이 전한다.


김세련(金世鍊)
字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소암(素菴) 본관은 선성이며 학문이 깊어 유고가 있다.


김성재(金聖齋)
字는 달겸(達兼)이고 호는 동애(東厓) 본관은 선성이며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김치규(金致圭)
字는 치경(致敬)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학행이 높았다.


김홍기(金鴻基)
본관은 안동으로서 학행이 있어 문집이 발간되었다.


김건(金健)
호는 미촌(美材)이고 奉祖의 증손이다. 행신이 근엄하고 학문이 깊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김광세(金光世)
호는 긍구재(肯構齋)이고 雲行의 아들로 실학에 힘써 사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권술(權 )
字는 술부(述夫)이고 호는 정묵당(靜黙堂)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후이다. 고서에 많은 연구가 있어 선비들 중에서도 물어 오는 사람이 많았다. 저서로는 정묵당집이 전하고 있다.


유인무(柳仁茂)
호는 죽곡(竹谷)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진일제의 후이다. 문장이 탁월하고 몸가짐이 정결하며 학업에 개을리 하지 않아 덕망이 높았다. 유고가 있다.


김운행(金雲行)
호는 두산(斗山)이고 汝煥의 아들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사림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유원립(柳元立)
호는 계당(溪堂)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炯의 손자이다 행의가 엄전하고 학구가 뛰어나 저서로 계당집이 전한다.


김여혁(金汝爀)
호는 둔암(遯庵)이고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노력하여 괴상흑백도(卦象黑白圖)와 태극흑백도(太極黑白圖)를 제작하였고 유고가 있다.


김학연(金學淵)
호는 노암(鷺巖)이고 본관은 영양으로 옥봉의 증손이다. 학행이 뛰어나 세인이 크게 우러러보았다. 저서로는 노암집이 간행되었다.


이인염(李仁廉)
호는 방옹(方翁)이고 본관은 전주로 천문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예학에도 심경을 기울여 행신이 준엄하였다.


유직립(柳直立)
호는 묵계당(黙溪堂)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뜻과 행동이 일치하여 추앙을 받았으며 학문연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유고가 있다.


유종해(柳宗海)
호는 관란(觀瀾)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학문이 정절하여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김식(金湜)
호는 혜포(蕙圃)이고 글 짓는 데 능숙하였고 글씨 또한 뛰어나 사림의 중망을 크게 받았다. 유고가 있다.


유백창(柳百昌)
본관은 전주로서 문장과 학행이 높았다.


이진규(李鎭奎)
字는 경초(景初)이고 본관은 진성이다. 오직 학문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이진우(李鎭祐)
字는 아수이고 호는 계애(溪厓), 본관은 진성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행이 뛰어났다.


이진현(李鎭鉉)
字는 아유(雅維)이고 본관은 진성이다. 오직 학문에만 잠심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이교승(李敎承) 고종 때~
字는 숙경(叔敬)이고 호는 서호(曙戶) 본관은 진성이다. 학문에 전심하여 유고가 전한다.


이용구(李龍九) 고종 때~
字는 의서(義瑞)이고 호는 몽이와(夢易窩)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학행이 높아 유고가 전한다.


이원효(李源孝) 고종 때 ~
字는 시립(始立)이고 호는 괴와(槐窩) 본관은 화산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아 저서로는 괴와집이 간행되었다.


이종국(李鐘國) 고종 때~
字는 치홍(致弘)이고 호는 채산(採山) 본관은 진성, 송재의 후이다. 학덕이 높아 유고가 전한다.


이종대(李鐘岱) 고종 때~
자는 봉숙(奉淑)이고 호는 기포(杞圃) 본관은 진성, 송재의 후이다.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유고가 있다.


이종원(李鐘元) 고종 때~
字는 군선(君善)이고 본관은 진성으로 시문에 능하여 시집이 전한다.


이종하(李鐘夏) 고종 때~
字는 예중(禮仲)이고 호는 자암(紫巖) 본관은 여주로 학행이 높았다.


이종하(李鐘河) 고종 때~
字는 이숙(伊淑)이고 호는 소우(笑愚) 본관은 진성이다. 난은의 후이다. 학문이 깊어 문집이 전한다.


이종화(李鐘和) 고종 때~
字는 중협(重協)이고 호는 옥봉(玉峰)이며 본관은 여주로 학덕이 높았다.


정지현(鄭之鉉)
字는 태보(台甫)이고 호는 명와(蓂窩) 본관은 청주, 매계의 후이다. 서예에 능하였고 시문에도 연구가 깊었다.


정영(鄭瀯)
字는 순형(舜衡)이고 호는 학전(鶴田) 본관은 청주이다. 옥마지(玉馬誌)와 흥주지를 저술하였다.


조춘식(趙春植)
字는 원숙(元叔)이고 호는 모현재(慕賢齋) 본관은 한양이며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홍낙종(洪洛種)
당성인(唐城人)이고 호는 신와(愼窩) 世恭의 후이다.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홍순국(洪淳國)
당성인 세공(世恭)의 후이다. 경학에 깊은 연구가 있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홍이원(洪爾遠)
당성인이며 세공(世恭)의 후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박운익(朴雲翼)
字는 붕거(鵬擧)이고 호는 천서(川西) 본관은 무안, 수서의 후이다. 학문과 행위가 뛰어나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박붕익(朴鵬翼)
字는 성필(成弼)이고 본관은 무안으로서 수서 善長의 후예로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저서로는 유고가 있다.


배선영(裵善榮) 1852~1930
字는 양오(養吾)이고 호는 내산(乃山) 본관은 흥해로서 주자학을 연구하여 사림의 추앙을 크게 받았다.


변유번(邊有蕃) 1605~?
字는 위보(衛甫)이고 본관은 원주로서 栢山의 손자이다. 춘당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주서에 특히 뛰어났으며 말인즉 독 詩라 하였다. 유고 2책이 전한다.


안규석(安圭錫)
字는 우현(禹玄)이고 호는 눌언제(訥言劑), 온순 과묵하여 남과 얘기할 때 논리가 정연하였다. 배움에 부지런하여 학문이 깊었다.


안필중(安弼重)
字는 은수(殷叟)이고 호는 두암(斗巖) 본관은 순흥으로서 학행과 덕망이 높아 유고가 있다.


여선재(余善才)
본관은 의령이다. 宋나라 사람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고려로 귀화했으나 기록 불명하다. 8학사와 같이 왔다고 한다. 생년월일과 묘소가 실전되어 단소로 행사하고 있다.


여강(余杠)
字는 제경(濟卿)이고 호는 인졸재(忍拙齋) 본관의령 부사 興烈의 후로 학문에 정진하여 사림의 사표가 되었다. 저서로는 인졸재집이 전하고 있다.


유달화(柳達華)
본관은 진주로서 친병에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에서 포상을 받았으며 학문에도 통달하여 제자를 많이 육성하였다.


유형원(柳亨源)
字는 통형(通亨)이고 호는 학계(鶴溪) 본관은 진주로서 학행이 뛰어나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권심관(權心觀)
字는 경국(景國)이고 號는 석우(石愚), 명화(鳴和)의 子이다. 文詞가 간결하고 오묘하며 정밀했다. 성품이 극히 孝하여 부친 환후 10년 동안 약 달이고 빨래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았다. 상신이 되어 매우 슬퍼하니 선비들이 모두 칭송했다. 부인 순흥안씨의 사적이 효순편에 실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런 집에 이런 부부가 있더라.” 했다.


권종도(權宗道)
字는 덕명(德明)이고 號는 회산(晦山) 또는 송석헌(松石軒)이다. 天資가 심중하고 문사(文詞)가 박흡(博洽)했다. 孝友와 德行으로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11세에 우공(愚貢)을 7번 읽고 외웠다. 도산서원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정정했다.


권정선(權正善)
字는 성노(性老)이고 호는 희암(希菴), 宗道의 자이다.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서 나이 13세에 우공(禹貢)을 11번만에 외웠다. 효가 출천하여 대변의 맛을 보고 북두칠성에 기도하며 나를 대신 죽게 해달라고 했다.
상을 당하자 항상 눈물이 흐르기를 비 오듯 해서 고침하던 마루가 50여 년이 지나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관에서 포상했으나 아들을 시켜 돌려보냈다.
용와(庸窩) 김우림(金遇林)과 지당(止堂) 이유화(李裕和)가 전(傳)을 지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봉화문화원님이 2023-02-13 오후 12:10:00 에 작성하신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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