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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인물

봉화문화원게시판
  등록일 : 2023-02-13 | 조회 : 367 | 추천 : 0 [전체 : 13 건] [현재 1 / 1 쪽] [로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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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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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절 음사 일천(蔭仕 逸薦)
제 5절 음사 일천(蔭仕 逸薦)

                                                         * 봉화군사(2022)의 내용을 따름


정공미(鄭公美)
본관은 봉화로서 고려 때 사람이다. 정의대부(正義大夫) 호부령(戶部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하였다. 奉化鄭氏의 시조이다.


정공수(鄭公壽)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奉化伯으로 봉함을 받았다.


정진(鄭津) 1361~l427
시호는 희절(僖節) 본관은 봉화로서 三峯 道傳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8년(1382)에 郎將이 되고 사재령(司宰令) 전농령(典農令)을 지내다가 1391년 정몽주 등의 탄핵으로 부친과 함께 삭직되고 조선이 개국되자 공신의 아들로서 廷安府使로 발탁되었다. 공조와 형조의 전서를 역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부친이 화를 입자 전라도 수군에 충군(充軍)되었다. 1407년 나주목사를 거쳐 仁寧府尹이 되고 세종 원년(1419)에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423년에 공조판서 개성유사(開城留司)로 있다가 1425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윤당(尹塘) 1422~?
본관은 파평(坡平)으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 증영의정(贈領證政) 소정공(昭靖公) 곤(坤)의 손자이다. 그의 장인인 영의정 지봉(芝奉) 황보 인(皇甫 仁)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화를 입고 일가친척이 화를 당하자 화산 땅(花山 : 현 봉화유곡)에 은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의 관직은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였다.


금용화(琴用和)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이다. 고려 때 비순위령(備巡衛領)의 중랑장을 지냈다.


금이화(琴以和)
본관은 봉화이고 중랑장(中郞將) 용화(用和)의 제(第)이다. 통덕랑(通德郎)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하였다.


금회(琴淮)
字는 자원(子源)이고 본관은 奉化로서 영렬공 儀의 후손이며 中郎將 用和의 아들이다. 음사(蔭仕)로서 승훈랑(承訓郎) 은진현감을 하였다.


금척(琴滌)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이다. 음사(蔭仕)로 통훈대부 장사(長沙)현감을 역임하였다.


금미(琴美)
본관은 봉화로서 부위(副尉)를 지냈다.


이희동(李希侗)
字는 군식(君式)이고 성종 때 참봉을 지냈다.


정원준(鄭元俊)
본관은 봉화다. 성종의 부마(附馬)인 봉성위(鳳城尉)가 되었다.


유대승(柳大承)
본관은 진주로서 음사로 사직하고 봉화에 처음으로 들어와 터전을 잡았다.


이수형(李秀亨) 1435~1528
字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도촌(桃材)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약관 17세에 음사로 조정에 나갔으며 평시서령 (平市署令)으로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원호(元昊) 조려(趙旅)와 함께 원주 치악산 바위에 충절을 맹세하는 이름을 나란히 새겨놓고 순흥 땅 도지리(道知里 : 현 봉화읍 도촌리)에 은거하였다. 거실을 지었는데 삼면은 벽이고 북쪽에 창문을 내었으니 북쪽은 영월 땅 단종의 능침이 있기 때문이다. 한평생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절을 올렸기에 눌은 이광정은 그 거실에 공북헌(拱北軒)이란 편액을 달았고 창설 권두경은 천인실(千仞室)이라 이름했다. 세조는 대군시절부터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식물을 자주 보내 주었고 중히 기용코자 했으나 거절하였다. 뒤뜰에 괴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부터 우연히 말라죽었다. 130년 뒤 단종이 복위되자 죽은 나무에 싹이 트고 꽃이 피어 이는 순흥 땅 금성단압각수(鴨脚樹 = 은행나무)의 전설과 더불어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좌승지로 추증되었고 다시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가증되고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공주 숙모전(肅募殿)과 초혼각(招魂閣)에 위패가 배설되었다. 뒷날 후손들에 의해 도촌실기(桃村實記)와 괴단광감록(塊壇曠感錄)이 출간되었다.


이양근(李養根) 세조 때~?
字는 숙달(叔達)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秀亨의 아들이다.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가훈을 쫓아 학업에 몰두하여 행의와 학덕으로 천거되어 전교서 별좌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에 전념하여 사림의 추증을 받았다.


권균(權鈞) 1435~1502
호는 도곡(陶谷)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左司諫 定의 증손이다. 영남 사림에서 金宗直과 함께 출사하여 선교랑(宣敎郎)에 이르렀으나 연산군의 학정을 간하다가 주효치 못하자 강주(剛州, 現 영주 이산면 지동)에 은둔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영남사림의 수장(首長)으로 덕망이 높았다.


금계(琴啓) 1439~1497
字는 옥경(沃卿)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12대 손이며 은진현감 淮의 넷째 아들이다. 품성이 어질고 굳건하며 재질이 영특하고 문장이 뛰어나 탁행으로 천거되어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또한 친상을 당하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소금과 죽으로 살면서 매양 슬퍼하니 세상이 그를 효자라 칭했다.


금징(琴徵)
號는 학관(學官)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좌랑을 역임하였다.


금원복(琴元福) 1480~l563
字는 成之요 본관은 봉화로서 啓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특출하며 학행이 뛰어나 음사로 추천되어 예조(禮曹)에 8년간 근무하면서 조정의 큰 행사를 잘 처리 주관하였다. 통정대부가 되어 면천군수(沔川郡守)를 비롯한 6고을 수령으로 재직하는 중에 곳곳이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대단했다.


금원수(琴元壽) 1485~1570
字는 一之고 본관은 봉화로서 원복(元福)의 아우다. 효성이 극진하고 문장이 뛰어나 음사로 충순위(忠順衛) 충무위(忠武衛)의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첨정(僉正)을 지냈다.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우(金佑) 1475~1553
문절공의 손자로 영주 삼판서댁에서 현 봉화읍 문단 1리 사암으로 이사하여 학문과 덕행을 닦으면서 유연자적하였다. 백암 金玏의 귀(貴)로 통정대부좌승지가 되었다.


권사수(權士秀) 1462~l522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곤(琨)의 넷째 마들이다. 봉화 우촌(隅村)과 봉성, 상운 일원에 많은 농장을 가져 중형(仲兄) 사빈(士彬)과 조카인 벌(橃), 예(欚)와 함께 유곡으로 이거하였다. 승훈랑(承訓郎) 갑산교수(甲山敎授)에 임명되고, 벽사찰방(碧沙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권예(權欚) 1482~1562
字는 숙범(叔泛)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성균생원 사빈(士彬)의 셋째 아들이다. 승사랑(承仕郎) 찰방(察訪)을 지냈다. 士友들과 같이 천정향약(川城鄕約)을 제정하였다.


권동필(權東弼)
字는 경 본관은 안동으로서 찰방 예(欚)의 아들이다. 사온서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홍할(洪劼)
본관은 남양이며 홍문관 정자(正字)를 지낸 사제 (思濟)의 아들이다. 찰방을 지냈다.


홍적(洪勣)
본관은 남양으로 할(劼)의 아우다. 찰방을 지냈다.


권집(權集)
字는 중성(仲成)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현감을 지낸 동미(東美)의 셋째 아들이다. 음사로 주부를 역임하였다.


권응창(權應昌)
본관은 안동으로서 책(策)의 아들이다. 참봉을 하였다.


금주(琴輳) 1485~1565
字는 의지(宜之)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英烈公 儀의 후예다. 계공랑(啓功郎)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역임하였다.


금재(琴榟)
字는 숙재(叔材)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종사랑 봉화현 훈도를 지냈다.


금은(琴𨏈) I533~?
字는 여임(汝任)이고 흐는 고암(高巖)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군위공 계(啓)의 손자다. 매헌공(梅軒公) 輔와 함께 李退溪의 문하에 들어가 도산서원 총운정사(寵雲精舍)에 머물면서 義에 대하여 논의할 때 조리가 정연하며 사례를 들 때 심오한 학문의 밑바탕을 근거하여 선생이 감탄하였다. 상중에 애통이 지극하여 효자로 이름났다. 우애를 얘기할 때는 이들 형제를 예로 들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공을 세워 通政大夫 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금응석(琴應石) 1508~l583
字는 경화(景和)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유림의 추천으로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를 역임하였고 정자를 지으니 退溪先生이 種善亭이란 현판을 써주었다. 흉년이 들자 혜민정에 큰솥을 걸어놓고 죽을 쑤어서 굶주린 사람에게 제공하고 곡식종자를 나누어주어 그 선행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금응협(琴應夾) 1526~l586
進仕란 참조


금응훈(琴應壎) 1530~l606
進仕란 참조


이붕(李鵬)
본관은 양성(陽城)으로서 중종 때 참봉을 하였다.


김균(金筠)
조선 성종 때 출생, 字는 筠之 호는 죽헌(竹軒)이며 본관은 光山으로 담암(潭庵) 用石의 둘째 아들이다. 蔭仕로 습독(習讀)을 역임하고 안동 구담에서 봉화 거수촌(巨樹村 : 현재 거촌)에 이거하여 입항조가 되었다. 눌재 李弘準, 묵재 金永權 등과 함께 川城鄕約을 제정하여 전국 향약의 규범이 되었다. 세대가 오래되니 문적이 없어져서 生卒年과 사적을 잘 모르고 오직 무오명현록(戊午名賢錄)에만 약간 기록되었을 뿐이다.


김학연(金學淵)
호는 죽청정(竹淸亭)이며 본관은 영양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신보상(辛輔商)
본관은 영월이며 찰방 윤형(尹衡)의 아들로 부사를 지냈다.


배준(裵峻)
字는 준지(峻之)이고 본관은 흥해로서 음사로 참봉을 하였다.


황전(黃躔)
字는 형보(亨甫)이고 본관은 창원으로서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지냈다.


황기(黃琦)
字는 중규(仲奎) 본관은 창원으로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


여몽득(余夢得)
字는 제뢰(帝賚)이고 본관은 의령(宜寧)으로서 奉直郎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을지냈다.


이덕장(李德障) 1482~?
字는 경부(慶簿)이고 본관은 경주로서 눌재 弘準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장부의 기상이 있어 속이 좁고 용렬한 무리와는 사귀기를 싫어하였으며 자제를 가르침에 아주 엄하게 하였고 음사로 찰방을 지냈다.


신응지(申應之)
字는 子欽이고 호는 경체당(景棣堂)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의흥현감을 지냈으며 치적이 있었다.


김극신(金克信) 1474~l548
字는 可立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文川郡守를 지냈다.


송의(宋儀) 1492~1582
字는 정중(正仲), 호는 원계(圓溪)이며 본관은 야성(冶城)으로 주부를 하였고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배유지(裵紐芷) 1564~l621
字는 文秀요 본관은 성주로서 安村 應褧의 아들이다. 천성이 단아하고 총명하여 鄭寒岡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이 청도군수로서 왜병과 접전할 때 의병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원종훈에 책록되고 선무랑(宣務郎)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에 임명되었다.


금봉선(琴奉先)
字는 효백(孝伯)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증직으로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받았다.


금몽상(琴夢祥)
字는 應休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감정(監正)을 하였다.


금진강(琴振綱)
字는 道成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주부를 역임하였다.


권광택(權光澤)
字는 술조(述祖)요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금난수(琴蘭秀) 1530~l604
司馬試 참조


이문정 (李文井)
字는 백원(伯原)이고 본관은 진성으로 참봉을 하였다.


배삼근(裵三近) 1536~l600
字는 汝勇, 호는 유산(儒山)이며 본관은 흥해로서 참봉을 하였다.


정사량(鄭思良)
字는 언직(彦直)이고 본관은 청주로서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지냈다.


신공온(申公蘊)
호는 타괴헌(打乖軒)이고 본관은 평산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금옥순(琴玉筍) 1530~l570
字는 청경(淸卿)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습독(習讀)을 역임하였다.


금의순(琴義筍) 1543~l592
字는 友卿이고 호는 취암(翠巖)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퇴계 李混 문하에서 수학하고 참봉을 지냈다.


금제순(琴悌筍) 1545~l611
字는 공숙(恭叔)이고 호는 적암(赤巖)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손이다. 李退溪 문하에서 공부하고 참봉을 하였다.


금윤선(琴胤先) 1544~l627
字는 이술(而述)이고 본관은 봉화이며 원한의 증손이다. 신체가 건장하고 의지가 굳었다. 왜란을 당하여 동래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워 이등훈(二等勳)으로 책록되고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역임하였다. 항상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어 매년 풍작과 흉작, 비 오고 가뭄이 생기는 일과 조정에 일어나는 모든 크고 작은 일, 향중과 동네에서의 사건과 사정을 60년 동안 썼다. 지금도 그의 日記錄이 있다.


금윤고(琴胤古) 1558~l641
字는 역여(繹汝)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보(輔)의 아들이다. 月川 조목(趙穆)에게 배워 중훈대부(中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왜란 이후 굶주린 자가 많아 죽을 끓여 먹였으며 노약자에게는 쌀을 보내주었다.


금낙고(琴樂古)
字는 순여 (純如)요 본관은 봉화로서 直長을 역임하였다.


금복고(琴復古) 1549~l632
字는 호여(皥如)요 호는 송음(松陰)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松溪軔의 아들이다. 朴承任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 유림의 추천으로 康陵참봉이 되고 왜란 때 공을 세워 원종훈신으로 호군(護軍)에 승진되었다.


금시문(琴是文) 1587~1618
字는 子張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梅軒輔의 아들이다.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를 역임하였다.


금길(琴硈) 1563~1630
字는 士重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主簿를 역임하였다.


금학고(琴學古) 1564~l630
字는 옹여(翁汝), 본관은 봉화다. 월천(越川) 조목(趙穆)의 문인(門人)으로 계공랑(啓功郎),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금상고(琴尙古) 1573~l643
字는 분여(賁汝), 본관은 봉화이다. 은(𨏈)의 子로서 장사랑(將士郎)을 하였다.


금신고(琴信古)
字는 부여(孚汝), 본관은 봉화이다. 은(𨏈)의 子로서 장사랑(將士郎), 곡성훈도(谷城訓導)를 했다.


금이해(琴以該) 1632~l709
字는 화지(和之)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장사랑(將士郎)을 하였다.


금병두(琴秉斗)
字는 경추(景樞), 본관은 봉화다. 참봉(參奉)이다.


금시영(琴是詠)
字는 영이(詠以), 봉직랑(奉直郎) 사첨시직장(司瞻遲直長)이다.


정준(鄭 遵)
본관은 청주이고 주부를 하였다.


황성(黃 惺)
字는 而敬이고 본관은 창원이며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를 지냈다.


정수(鄭 璲)
字는 경보(景寶)요 호는 연당(蓮塘)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훈도(訓導)를 하였다.


정사공(鄭士恭)
字는 子安이고 본관은 청주로서 교수를 지냈다.


정사의(鄭士毅)
字는 子弘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교수를 하였다.


권억령(權憶齡)
字는 齡之요 본관은 안동으로서 습독을 지냈다.


정응태(鄭應台)
字는 泰三, 호는 매암(梅巖), 본관은 청주로서 현감을 지냈다.


정사온(鄭思溫)
字는 언화(彦和), 호는 농은(聾聾)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사직(司直)을 하였다.


구찬록(具贊祿)
字는 여응(汝應), 호는 송안(松顔)이며 본관은 능성(綾城)으로서 현감을 지냈다.


권채(標采) 1557~1599
字는 공량(公亮), 호는 송암(松巖)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沖齋) 벌(橃)의 손자다. 음사로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지낼 때 왜란이 일어나자 방백들이 도망쳤으나 공은 모여드는 수천 명의 인근 주민들을 구휼했고 난중에 세상을 떠났다.


권래(權來) 1562~1627
字는 낙이(樂而), 호는 석천거사(石泉居士)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采의 아우이다. 신체가 장대하여 큰 황소를 타고 다녔다. 벼슬은 군자감정을 지냈는데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와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문장에 능해서 암천세고(巖泉世稿)에 글이 전하고 있다.


곽호연(郭浩然)
본관은 玄風으로 참봉을 하였다.


황충헌(黃忠憲)
字는 도숙(度叔)이고 본관은 창녕으로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다.


홍석유(洪奭裕) 1851~l927
字는 孟元이고 호는 二山亭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변약(邊鑰) 1574~1659
字는 士圓요, 호는 대송헌(對松軒)이며 본관은 원주로서 백산(栢山) 경회(慶會)의 아들이다. 일천으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제수받고 수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하였다.


정사경(鄭思敬)
字는 士 懿, 본관은 동래로서 文峯 惟一의 后이다. 주부를 지냈다.


유한(柳漢)
字는 而漢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문단리 뱀바위(蛇岩)에서 살다가 東萊公 금휘(琴微)의 사위가 되어 처가가 가까운 하이골(鶴洞)로 옮겼다. 음사로 참봉을 하였다.


송수(松琇)
字는 방보(邦寶)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송영(松瑛)
字는 현보(賢寶)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황천일(黃千一)
字는 성응(聖應)이고 본관은 창원으로서 별제(別提)를 역임하였다.


변경응(邊慶應)
字는 善叔이고 본관은 原州로서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김세은(金世殷) 1486~l543
字는 은경(殷卿)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생원 克禮의 아들이다. 영해교수(寧海敎授)를 역임하였다.


김득청(金得淸) 1583~1636
字는 이수(李粹),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다. 교수를 지냈다.


정정(鄭楨)
字는 건숙(建叔) 본관은 청주로서 군수를 지냈다.


신경명(申敬命)
본관은 평산으로서 공조좌랑(工曹佐郎)을 역임했다.


홍석(洪錫) 1604~1675
字는 공숙(公叔), 호는 손우당(遜愚堂)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굴욕적인 화의가 맺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아래 춘양에 와서 은거하였다. 그 후에 김수항(金壽恒) 송시열(宋時烈)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참봉이 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좌익위(左翊衛)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민공(貞敏公)이다. 상제요록(喪祭要錄), 예기류회(禮記類會) 일유록(日有錄)과 손우집(遜愚集)이 전하고 있다. 태백오현(太白五賢)의 한 사람으로 사덕사(俟德祠)에 제향되고 있다.


심장세(沈長世) 1594~1660
字는 덕조(德祖), 호는 각금당(覺今堂)이며 본관은 靑松으로서 손암(巽菴) 심의겸(沈義謙)의 손자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해서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되었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까지 호가(扈駕)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봉화에 와서 출사하지 않고 홍우정, 강흡, 홍석, 정양들과 함께 태백오현의 한 사람으로 절의를 지쳤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각금당집이 있다.


정양(鄭瀁) 1602~1668
字는 安叔, 호는 우익(宇翼) 경외(敬畏) 포옹(抱翁)이며 본관은 영일(迎日)로서 송강(松江) 정철(鄧澈)의 손자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갔으나 성이 함락되니 자살하려다 뜻을 못 이루고 그 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기용되고 의금부도사, 현창주부(縣倉主簿) 수군판관 등을 거치고 지방 수령을 나갔다가 치적을 올려 장령까지 이르렀다. 「태백오현」의 한 분이다. 吏曺判書에 추증되고 유집이 전한다. 시호는 文節이다.


금응균(琴應均)
字는 경청(景淸)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영렬공의 후예다. 참봉을 역임하였다.


금응종(琴應鍾)
字는 子羽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奉仕를 역임하였다.


금삼달(琴三達)
字는 이겸(爾兼)이고 호는 설헌(雪軒)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시민(金時敏) 1578~?
字는 손경(遜卿)이고 호는 일용재(一𢤱)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역임하였다.


홍근(洪勤)
字는 정보(貞甫)요 본관은 남양으로서 판관(判官)을 지냈다.


홍면(洪勉)
字는 근보(勤甫)요 본관은 남양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안여성(安汝性)
본관은 순흥으로서 조선 인조 때 참봉을 하였다.


유만영(柳萬齡)
字는 子萬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인조 때 참봉(參奉)을 하였다.


이유안(李惟顔)
字는 자우(子愚)이고 본관은 花山으로서 인조 때 주부(主簿)를 하였다.


김근청(金謹淸) 1578~l639
字는 공화(公和)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음직으로 부사(府使)를 지냈다.


권목(權霂) 1614~1671
字는 선행(善行)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상충(尙忠)의 아들이다.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금시평(琴是平) 1588~?
字는 자평(子平)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보(輔)의 아들이다. 중훈대부(中訓大夫)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금시양(琴是養) 1598~l664
字는 자선(子善)이고 號는 삼기당(三棄堂)이다. 본관은 봉화로서 매헌(梅軒) 보(補)의 손자이다. 광해(光海) 10년에 향시에 뽑혀 서울에 과거를 보려고 갔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기 위한 음모가 한창이었다. 외삼촌을 찾아갔더니 역시 같은 북인(北人)이라 폐비음모에 가담하라고 권유하기에 즉석에서 불응하고 "삼강(三綱)이 끊어졌구나"하고 돌아왔다. 얼마 후 다시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갔을 때 인조대왕(仁朝大王)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을 하는지라 서쪽을 보고 통곡하며 "이제 천하는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구나"하고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스스로 號를 삼기(三棄)라 하고 초야에 묻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세상과 인연을 끊으니 사람들이 숭정처사(崇幀處士)라고 불렀다. 英祖 21년(乙丑 1745)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指平)에 증직(贈職)되고 정려(旌閭)가 내렸다. 문집인 삼기집(三棄集)이 있고 유허비(遺墟碑)는 문촌에 있다.


금익룡(琴翼龍)
字는 운서(雲瑞)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부정(副正)을 지냈다.


금득룡(琴得龍)
본관은 봉화로서 감정(監正)을 지냈다.


배진구(裵晋龜) 1649~l727
字는 문경(文卿)이고 호는 노정(鷺汀)이며 본관은 성주로서 유장(幼章)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사림(士林)의 천거로 참봉을 거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유고가 있다.


여굉(余宏)
字는 명중(明仲)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으로서 직장(直長)을 지냈다.


홍이원(洪爾遠)
字는 자치(子致)요 본관은 남양으로서 호군(護軍)을 하였다.


변유해(邊有海) 1608~?
字는 대이(大而) 본관은 원주(原州)로서 약(鑰)의 아들이다. 오춘당(吳春塘)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인조 때 찰방(察訪)을 하였다.


유인건(柳仁健)
字는 미회(美晦)요 본관은 전주로서 첨정(僉正)을 지냈다.


유인식(柳仁植)
字는 입부(立夫)요 본관은 전주로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이지호(李之虎)
효종 때 군수를 지냈다.


홍익형(洪翼亨) 1581~l661
字는 子昇이고 호는 소은(小隱)이며 본관은 남양으로 이성(以成)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때(1636) 아우 익한(翼漢)이 순국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나라 걱정을 하였다. 효종임금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 21년(1745)에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홍진형(洪進亨)
字는 회숙(會叔)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효종 때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이여림(李輿霖) 1806~?
字는 우여(雨汝)이고 호는 우학재(友鶴齋)며 본관은 진성이다. 손자 계로(啓魯)가 귀하게 되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저서에 우학집(友鶴集)이 전한다.


김광렬(金光烈) 1637~1713
字는 광보(光甫)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현종 때 현감을 지냈다.


금상영(琴尙韺)
字는 희성(希聖)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금이로(琴以魯)
字는 희회(希會)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금홍벽(琴弘壁)
字는 국옥(國玉)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참의(參議)를 하였다.


금극인(琴克仁)
字는 숙자(叔紫)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하였다.


홍극(洪克) 1613~l679
字는 극기(克己)요 호는 斗山, 본관은 남양으로서 杜谷 宇定의 큰 아들이다. 장흥고(長興庫) 직장(直長)에 천임되었다.


홍빙(洪凭) 1622~1705
字는 성임(聖任) 호는 제산(霽山)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두산 극(克)의 아우다. 허미수(許眉叟)의 문인으로 文行이 뛰어나 경기도 우수영 판관에 천임(薦任)되었다.


유종립(柳宗立)
字는 진부(眞夫)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仁健의 아들이다. 현종 때 찰방을 하였다.


김한벽(金灌壁)
字는 명서(明瑞)이고 본관은 光山으로서 현감을 하였다.


권이번(權以璠)
字는 주성(周成)이고 호는 東巖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안필제(安弼濟)
字는 원겸이고 본관은 순흥으로서 감역을 하였다.


김경학(金景㶅)
字는 청언(淸彦)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추증 이조참의를 했다.


홍양묵(洪養黙)
字는 백회(伯晦)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도정(都正)을 지냈다.


홍용묵(洪容黙)
字는 계회(季晦)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양묵(養黙)의 동생이다. 관직은 도정이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홍간(洪侃)
字는 여강(汝剛) 본관은 남양으로 현감을 하였다.


권명신(權命申) 1706~l783
字는 태중(台仲) 호는 선암(仙巖)이다. 도곡(陶谷) 균(鈞)의 10세손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의 문하생으로 덕망과 경륜이 높았으며, 그의 문하에 유광문(柳光汶), 정수윤(鄭受潤), 전계렴(全繼濂) 등이 뛰어났다. 유언으로 구휼전을 두어 어려운 사람을 구휼케 했고 정조 8년에 시폐를 상소하였다. 1.군정불수(軍政不修) 2.전정불균(田政不均) 3.환정부정(還政不正) 4.과거불공(科擧不公) 5.당론장현(黨論戕賢) 6.관리탐장(官吏貪贓)의 폐단과 그에 대한 대책을 명시하였다. 지금도 그의 의시폐소(擺時弊疏) 원문이 남아 있다.


김여횡(金汝鐄)
字는 홍지(洪之)이고 호는 상로재(霜露齋)이며 본관은 의성으로 참봉을 하였다.


홍정유(洪鼎裕)
字는 의경(宜卿) 본관은 남양으로 부사를 역임하였다.


홍진유(洪鎭裕)
字는 군유(君游)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군수를 지냈다.


홍덕유(洪德裕) 1862~l913
字는 달경(達卿) 본관은 남양으로서 통정대부 충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박세흥(朴世興)
字는 성백(成伯) 본관은 무안으로서 숙종 때 참봉을 하였다.


전해(全海)
字는 대용(大容) 호는 학계(鶴溪)이며 본관은 옥천으로서 인의(引儀)를 하였다.


강택일(姜宅一) 1726~l808
字는 자경(子敬) 호는 파서(琶西) 본관은 진주로서 감역(監役)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琶西集이 있다.


권사직(權師稷)
字는 심지(審之) 호는 만각재(晩覺齋)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강재항(姜再恒) 1689~l756
字는 구지(久之)이고 호는 입재(立齋)이며 본관은 진주로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인이다. 경학문장(經學文章)에 뛰어나 묘당(廟堂)의 추천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고 회인현감(懷仁縣監)에 제수되어 고을을 잘 다스렸다. 저서로는 立齋集 15권 추원록(追遠錄) 5권이 간행되었다.


강필효(姜必孝) 1764~l848
字는 중순(仲順)이요 호는 해은(海隱)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윤소곡(尹素谷)의 문인이다. 주자학(朱子學)에 정통하고 1803년 암행어사의 천거로 순릉참봉(順陸參奉)이 되고 1814년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뒤에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와 충청도 도사를 역임한 뒤 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도맥(道脈)을 이어 받아 기호학파의 거두(巨頭)로서 과재(果齋) 성근묵(成近黙) 등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해은집(海隱集) 근사록(近思錄) 주문경설(朱門經說) 등 실로 방대하다.


김필동(金必東) 1706~1756
字는 子明이고 호는 나계(羅溪)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활오헌(八吾軒) 성구(聲久)의 증손이다. 蔭補로 參奉하였다. 저서로는 나계집(羅溪集)이 전하고 있다.


김희택(金熙澤) 1742~1818
字는 世則이고 호는 해사(海寫)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必東의 아들이다.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홍준(洪遵) 1709~1776
字는 성유(聖由)이고 호는 묵와(黙窩)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천, 임명되었다.


홍균(洪均) 1786~1824
字는 사평(士平) 본관은 남양으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小東頁이중광(李重光) 1709~l778
字는 경휴(景休)이고 호는 창애(濸厓)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난은( 隱)) 동표(東標)의 장손이다. 영조 18년(1742)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과 세자익위사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창애집」이 전한다.


황시채(黃時采)
字는 화여(華汝)이고 호는 행산(杏山)이며 본관은 평해로서 참봉을 지냈다.


이진우(李鎭祐)
字는 아수(雅受)이고 호는 계애(溪厓) 수운재(水雲齋)며 정조 때 참봉을 하였다.


김두동(金斗東) 1732~l776
字는 만첨(萬瞻)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손이다.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김홍렬(金弘烈) 162~1587
字는 의보(毅甫)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예다. 음사(陰士)로 동몽교관을 하였다.


이철(李哲)
字는 경보(敬甫)요 본관은 전주로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하였다.


홍만후(洪晩厚) 1811~1898
字는 덕수(德守)이고 호는 경재(敬齋)요 본관은 남양으로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하였다.


홍명후(洪命厚)
字는 치성(穉性)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홍복유(洪復裕)
字는 도경(道卿) 본관은 남양으로서 정조 때 참봉을 하였다.


홍증후(洪曾厚)
字는 치유(穉唯)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정조 때 참봉을 하였다.


권사윤(權思潤) 1722~l803
字는 덕공(德功) 호는 신천재(信天齋)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생원 정운(正運)의 아들이다. 정조 때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고 1791년 도백(道伯)이 추천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 동몽교관을 지냈다. 저서로 「信天齋集」이 있다.


김진동(金鎭東) 1727~l807
字는 정지(定之)요 호는 소암(素巖)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八吾軒의 후손이다. 출사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조 때 일천으로 감역을 하였다. 저서로는 素巖集과 분빈세고(聞貧世稿) 11권이 있다.


김희익(金熙益) 1773~1829
字는 (禾后遷)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八吾軒의 후예다. 동몽교관을 하였다.


권응도(權應度) 1737~l793후
字는 백심(伯審)이고 호는 현와(弦窩)로서 충재의 9대 주손(冑孫)이다. 참봉을 하였으며 저서로는 석천지(石泉誌)가 있다.


권재대(權載大) 1778~l859
字는 여거(汝車)요 호는 정산(晶山)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정조 19년에 참봉으로 천거되고 특진관을 거쳐 철종 2년(1851)에 가선대부 공조참판이 되었다. 유고가 있다.


김재진(金在振) 1767~l847
字는 성거(聖擧)요 호는 송암(松菴)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참봉,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김희손(金熙遜) 1779~l852
字는 치순(穉順)이요 본관은 의성으로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나정규(羅廷奎)
본관은 나주로서 순조 때 참봉을 지냈다.


여우정(余友靖)
字는 경안(景安)이고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참봉을 지냈다.


황시복(黃時復)
字는 내초(來初)이고 본관은 창녕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금성흡(琴聲翕)
字는 해언(該彦) 본관은 봉화로서 종사랑(從仕郎)이 되다.


금명룡(琴命龍)
字는 치운(致雲)이고 본관은 봉화이며 영렬공의 후예다. 봉사(奉事)를 지냈다.


금시윤(琴是胤)
字는 지사(之嗣)이고 본관은 봉화이며 광해 때 승사랑(承仕郎)을 하였다.


금인달(琴仁達) 1630~?
字는 방경(邦卿)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장사랑(將士郎)을 하였다.


금성달(琴聲達)
字는 방문(邦聞)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광해 때 승사랑(承仕郎)을 하였다.


금효겸(琴好謙)
字는 경익(景益)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하였다.


금낙수(琴樂水)
字는 성원(聖源)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주사(主事)를 하였다.


정익렬(鄭翼烈)
본관은 하동(河東)으로서 음사로 현감을 지냈다.


이두상(奈斗相)
字는 순서(舜瑞)이고 본관은 진성으로 순조 때 참봉을 하였다.


강문규(姜文奎)
字는 경회(景會)이고 호는 근재(謹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봉사를 하였다.


정윤수(鄭崙秀)
字는 경원(景原)이고 본판은 청주로서 순조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강진(姜鎭) 1860~?
字는 정능(靜能) 호는 백초(白樵)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해산(海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참봉을 하였다.


박현로(朴顯魯)
字는 주팔(周八)이고 본관은 무안으로 현종 때 감역을 지냈다.


박현민(朴顯玟)
字는 문옥(文玉)이고 본관은 무안으로서 현종 때 도정을 하였다.


강최일(姜最一) 1749~?
字는 사량(士良)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직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하였다.


송복담(宋福聃)
字는 기백(耆伯)이고 호는 낙천재(樂天齋)이며 본관은 야성(治城)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박세현(朴世鉉) 1853~l925
字는 성오(星五) 호는 소와(素窩)이며 본관은 무안으로서 고종 때 참봉을 하였다.


신박(申珀)
字는 중옥(仲玉)이고 본관은 평산으로서 사의(司議)를 지냈다.


신공헌(申公獻)
字는 헌지(獻之)요 본관은 평산으로서 사용(司勇)을 하였다.


신운(申雲)
字는 대규(大奎)이고 호는 청수당(淸粹堂)이며 본관은 평산으로서 주부를 하였고 이조참의로 증직되었다.


신재달(申再達)
字는 덕수(德叟)요 호는 평산으로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김재관(金載瓘) 1837~l899
字는 대규(大奎) 호는 역월재(櫟月齋)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현감을 하였다.


황순택(黃順澤)
본관은 평해로서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권정하(權定夏) 1814~l868
字는 우필(禹弼)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감역(監役)을 지냈다.


이회상(李會相) 1820~?
字는 덕문(德文) 호는 만포(晩圃)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감역(監役)을 거쳐 도정(都正)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계로(啓魯)의 귀(貴)로 증직, 이조참판이 되었다. 저서로는 晩圃集이 있다.


김달수(金達銖) 1814~?
字는 필오(必吾)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감역을 하였다.


배집(裵緝) 1736~1785
호는 자소재(自笑齋)이고 본관은 흥해로서 음사로 참봉을 하였다.


권연하(權璉夏) 1813~1896
字는 가기(可器) 호는 이재(頤齋)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11대손이다. 부친 소헌공(疎軒公) 재륜(載綸)과 족부(族父) 서포공(西圃公) 재성(載成)에게 배워 문사가 숙달되었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문하에서 경학을 배워 항상 제1인자로 칭송을 받았다. 선사복규후유사(先師服闋後遺事)를 짓고 청암정 삼계서원 등지에서 강론하니 듣는 자가 수백 명이었다. 이단사설을 경계하고 안으로 뜻을 높이고 바깥일에 겸양하니 원근각처에서 방문자가 끊어지지 않았다. 만년에 경학(經學)의 거유(巨儒)로 추천되니 선공감역이 되고 188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을미사변 후 卒하였다. 저서로는 이재집(頤齋集)이 전한다.


권상직(標相稷) 1832~1900
字는 도안(道顔) 호는 진암(縝庵)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13대 주손이다. 도사(都事)를 지냈다.


김휘준(金輝濬)
字는 문숙(文叔) 호는 희재(希齋)며 본관은 선성(宣城)으로서 감역을 지냈다. 저서로는 희재집(希齋集)이 있다.


강조영(姜祖永) 1873~?
字는 양원(養遠) 호는 정재(正齋)며 본관은 진주로서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강제(姜濟) 1872~?
字는 미세(美世) 호는 계하(桂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박윤채(朴潤采)
字는 문겸(文役)이며 본관은 무안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이증로(李曾魯) 1845~l908
字는 성화(聖華)이고 호는 소파(小坡)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동표(東標)의 후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승훈랑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소파집이 있다.


이기복(李基福) 1635~1713
字는 향경(響卿)이고 호는 태봉(含峯)이며 본관은 우계(羽溪)로서 음사로 종사랑(從仕郎)을 하고 유고가 있다.


금경렬(琴景烈)
字는 덕문(德文)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의관(議官)을 하였다.


이기로(李基魯) 1825~1902
字는 성경(聖敬)이고 호는 정산(晶山)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학행으로 천거되어 감역(監役)을 하고 通政大夫를 하였다.


구성희(具成喜)
字는 행언(行彦) 호는 갈초(葛樵)이며 본관은 능성으로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김동규(金東奎)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음사로 교관(敎官)을 하였다.


권계화(權啓和) 1838~l 917
字는 계현(繼賢)이고 호는 국포(菊圃)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홍문관 박사(博士)를 하였다. 천성이 착하고 용모가 밝고 순수했다. 博學經文하여 글씨와 글이 물 흐르듯 하여 영남 제일이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하다. 문집 4권이 있다.


여병균(余秉均) 1848~1906
字는 형국(衡國) 호는 정산(鼎山)이며 본관은 의령으로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하였다.


곽종석(郭鐘錫) 1846~l919
字는 명국(鳴國) 또는 연길(淵吉)이고 호는 면우(俛宇), 회와(晦窩)로 경남 단성현(丹城縣) 사월리(沙月里) 초포(草浦)에서 출생하여 중년(中年)에 춘양면 학산리 새목에 은거하였다. 만년에는 경남 거창으로 갔다가 달성감옥에서 서거하였다. 25세에 사단칠정경위도(四端七情經緯道)를 저술하였다. 그는 칠정 대신 십정이라 하고 우(憂) 분(吩) 구(懼)를 더하였다. 그는 李寒洲의 제자로서 우리나라 유학의 大宗이다. 50세에 비안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58세에 正二品 通政大夫 비서원승(秘書院承)을 지내고 참찬(參贊)으로 승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적신을 처단하라고 상소하였으며 열국공법에 호소할 것을 청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함을 보자 비분강개하여 그 이름을 도(俛)로 字를 연길(淵吉)이라 고쳤다. 이는 도연명(陶淵明) 김길문(金吉文) 두 사람의 성과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지어 心山 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게 하였다. 이 장서는 김황(金榥), 권상익(權相翊)이 초한 것을 면우가 수정한 것이다. 長書의 원문은 上海에서 英文으로 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인쇄되어 세계 각국에 우송되고 국내 각 곳 각 향교에 배포되었다. 이로써 3 ․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에 제외되었던 유림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으로 인해 그해 4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 달성감옥에서 2년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 俛宇集이 전하며 면우연보(俛宇年譜)가 있다.


강수원(姜遂元)
字는 성여(成汝)요 본관은 진주로서 판관을 하였다.


강음(姜鎔) 1846~1934
字는 계명(季明) 호는 정와(靖窩) 또는 만산(晩山) 본관은 진주로서 덕망으로 고종 경자년(1900)에 영릉참봉에 제수되고 光武 7년(1903)에 통정대부에 올라 중추원의원과 도산서원장(陶山書院長)을 하였다. 을사년(1905)이후 문밖을 나서지 않았으며 1910년 망국의 한(恨)을 학문으로 달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鐘錫)과 나라를 걱정하며 뒷산에 ‘望美臺’를 쌓고 조석으로 그곳에 올라 국운회복의 염(念)을 읊은 시가 있다. 저서로는 靖窩集 10권 5책이 있다.


금이현(琴理絃)
字는 순오(順五)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참봉을 하였다.


권상문(權相文) 1850~l931
字는 목여(穆如) 호는 경재(耕齋) 또는 해창(海蒼) 본관은 안동이다. 일천으로 밀양부사, 경주부윤(慶州府尹), 평안어사(平安御使)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기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참여하였고 독립군 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왜경을 피해 은신하였다. 해창일고(海蒼逸槁)를 남겼다. 경주 부윤 때 에밀레 종각을 보수했다.


권상필(權相弼) 1852~l909
字는 경국(景國) 호는 갈와(葛窩) 본관은 안동으로서 희릉참봉을 지냈다.


김숙(金塾)
字는 공서 (公序)요 본관은 선성(宣城)으로 고종 때 군수를 하였다.


강유(姜鍮)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참봉을 하였다.


금영중(琴永重)
본관은 봉화로서 고종 때 참봉을 하였다.


유후근(柳厚根) 1848~l938
字는 중원(重元) 호는 모대(慕臺)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종사랑 순릉참봉(順陵參奉) 중추원의관을 하였으며 유고가 있다.


유영일(柳永軔)
호는 야은(也隱)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고종 때 참봉을 하였다.


홍재진(洪載振)
字는 순옥(順玉)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고종 때 도정(都正)을 지냈다.


홍재면(洪載勉)
字는 직여(直汝)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고종 때 감역을 지냈다.


김흥림(金興林) 1833~l910
字는 청여(淸汝)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고종 때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김오영(金五永) 1896~l926
字는 범일(範一)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八吾軒의 후예로서 고종 때 주사를 역임하였다.


김도영(金度永) 1846~l919
字는 형일(衡一)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八吾軒의 후예다. 고종 때 주사를 역임하였다.


황학구(黃鶴九)
호는 우은(愚隱)이고 본관은 평해로서 고종 때 참봉을 지냈다.


이흥로(李興魯) 1849~l923
字는 성언(聖彦)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난은 동표(東標)의 6대손이다. 고종 때 효릉참봉(孝陵參奉)을 지냈다.


이성필(李誠弼) 1853~1927
字는 성용(誠庸)이고 호는 계서(溪西)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재당숙 석영(錫永)의 문인이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1905년 영릉참봉과 사직서(社稷署) 참봉에 발령되었으나 세상이 어지러우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승로(李承魯)
字는 순조(舜祚)이고 호는 행포(杏圃)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이정필(李廷弼)
字는 성백(聖百)이고 호는 오산(午山)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유릉참봉(裕陵參奉)을 하였다.


이선필(李璿弼)
字는 예옥(睿玉)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종친부(宗親府) 주사를 하였다.


홍난유(洪蘭裕)
字는 성대(聖待)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고종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김윤근(金潤根)
字는 완여(完汝)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蔭仕로 군수를 역임하였다.


김정구(金正龜) 1862~1930
字는 군공(君恭)이고 호는 귀암(龜庵)이며 본관은 경주로서 고종 때 주사를 하였다.


홍석유(洪奭裕)
字는 맹원(孟元)이고 호는 이산(二山)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고종 때 참봉을 하였다.


권심설(權心說)
字는 설지(說之)이고 호는 석와(石窩)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박사가 되었다.


김희연(金禧淵)
字는 복여(福汝)이고 호는 후오(后悟)이며 본관은 연안으로서 고종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김인식(金仁植) 1855~l910
字는 의경(義卿)이고 호는 암운(巖雲)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斗永의 아들이다. 고종 때 通訓大夫 崇惠殿 참봉을 지냈다.


이종보(李鍾輔) 1846~l918
字는 대연(大演) 호는 계산(溪山)이며 본관은 羽溪로서 秀亨의 후예다. 1895년 일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사방에서 의병이 봉기하니 공은 "내가 글을 읽은 사람으로서 군신의 의리를 배웠거늘 어찌 앉아서 나라가 망함을 보겠느냐!" 하고 분연히 의기를 들고 진행을 서두르는데 왕명으로 군사를 파하고 말았다. 1899년 장릉(章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만년에 향촌에 경체당(景棣堂)을 지어 두 아우 종헌(鍾軒) 종철(鍾轍)과 더불어 늙도록 극진한 우애 속에 지냈다.


이종원(李鍾元) 1854~l904
字는 배수(盃叟) 호는 야은(埜隱) 본관은 우계로서 중추원 의관을 하였다.


금봉상(琴鳳祥)
字는 경의(景儀)이고 본관은 봉화다. 습독(習讀)을 하였다.


권긍하(權肯夏) 1857~l936
字는 우석(禹錫) 본관은 안동으로서 주사를 하였다.


금정원(琴楨遠)
字는 汝民이고 본관은 봉화다. 주사를 하였다.


이교필(李敎弼)
字는 元五이고 號는 비암(庇菴)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참판 계로의 아들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거쳐 좌랑 지평 군위군수를 역임하고 通政大夫에 올랐다. 유고가 있다.


정교영(鄭敎永)
字는 순해(舜諧)이고 호는 금촌(琴材)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금병두(琴秉斗)
字는 경추(景樞)이고 본관은 봉화이며 참봉을 하였다.


박성흠(朴性欽)
字는 이도(而道)이고 호는 괴당(槐塘)이며 본관은 영해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순영(金順永) 1861~1934
字는 성연(聖淵)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효릉(孝陵)참봉을 하였다.


이교덕(李敎德) 1861~l919
字는 경달(景達)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정성흠(鄭成欽)
字는 성오(省五)이고 본관은 청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정우흠(鄭祐欽)
字는 경일(景一)이고 호는 만우(晩愚)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이승우(李承宇)
字는 계문(繼文)이고 호는 가산(可山)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금시영(琴是詠)
字는 영이(詠而)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사첨시(司瞻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병헌(金炳憲) 1883~l957
字는 순빈(舜斌)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穆陵 참봉을 하였다.


손이모(孫以謨)
字는 경의(景毅)이고 본관은 의주로서 음사로 감찰(監察)을 하였다.


김성호(金成鎬)
字는 윤집(允緝)이고 호는 국사(菊縜)이며 본관은 의성이다. 의관(議官)을 지냈다.


강준(姜浚)
字는 만유(萬有) 호는 우농(愚儂)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주사를 역임하였다.


강회(姜淪) 1883~?
字는 구여(九汝) 호는 법우(法愚)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이교영(李敎榮)
字는 덕래(德來)요 호는 금호(錦湖)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를 역임하였다.


김재종(金在宗)
본관은 경주로서 도사를 지냈다.


김인수(金寅銖)
字는 성자(聖者)요 본관은 의성으로서 감역을 지냈다.


송인현(宋寅鉉) 1886~?
字는 이경(耳卿) 호는 죽남(竹南)이며 본관은 야성으로서 중추원의관을 역임하였다.


김병태(金炳台) 1731~1791
字는 응삼(應三)이요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금석화(琴錫和) 1861~?
字는 순보(舜普)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사랑(通仕郎) 창릉(昌陵) 참봉을 하였다.


정규영(鄭珪永)
字는 순현(舜玄) 호는 금산(琴山) 본관은 청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숙진(金肅鎭) 1869~1928
字는 구서(九叙) 호는 백초(白樵)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내부주사를 지냈고 유고가 있다.


황기창(黃基昌)
字는 이건(而建)이요 본관은 창원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하였다.


강호(姜灝)
字는 순백(淳伯) 호는 표헌(杓軒)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참봉을 지냈다.


정성흠(鄭聖欽)
字는 계명(啓明) 호는 죽포(竹圃)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동몽교관을 하고 학행이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군자라 하였다.


이만하(李晩夏)
字는 완택(完澤)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주사를 하였다.


이승국(李承國)
字는 복언(福彦)이고 호는 우와(愚窩)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지냈다.


권위하(權瑋夏)
字는 사성(士成)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권중형(權重亨)
字는 경선(景善)이고 호는 송와(松窩)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감낙원(金洛源)
字는 성칙(聖則) 호는 경암(耕巖)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주사를 지냈다.


이종연(李鍾淵)
字는 회일(會一)이고 본관은 화산으로서 주사를 지냈다.


이철우(李喆羽)
본관은 진성으로 고종 때 참봉을 하였다.


배영빈(裵永彬)
字는 士吉이고 호는 어은(漁隱)이며 본관은 성주로서 고종 때 주사를 지냈다.


박영택(朴永澤)
字는 경수(景壽)이며 본관은 무안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하였다.


박용택(朴龍澤)
字는 경춘(景春)이고 호는 취진(醉震)이며 본관은 무안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하였다.


권문섭(權文燮) 1878~l906
字는 공유(公柔)이고 호는 옥암(玉庵)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하였다.


권화섭(權和燮) 1883~1907
字는 공우(公友)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지냈다.


정석기(鄭錫淇)
본관은 봉화로서 고종 때 주사를 하였고 군수서리(郡守署理)를 지냈다.


이교해(李敎海)
字는 사성(四聲)이고 호는 영교(嶺喬)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고종 때 참봉을 지냈다.


박규택(朴奎澤)
字는 찬여(燦汝)이고 본관은 무안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역임하였다.


박운택(朴雲澤)
字는 경원(景遠)이고 본관은 무안으로서 고종 때 참봉을 지냈다.


권응섭(權應燮) 1871~l911
字는 원필(元弼)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혜민원(惠民院) 주사를 지냈다.


전규영(全奎泳) 1856~1943
字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만송(晩松)이며 본관은 옥천으로서 1905년 조경묘(肇慶廟) 참봉을 지냈다.


김창근(金昌根) 1878~l959
字는 회부(晦夫)이고 호는 일초(一草)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관리서(管理署) 주사를 지냈다. 「일초유고」가 전하고 있다.


강일영(姜日永)
字는 하경(夏卿) 호는 유운(柳雲) 본관을 진주로서 고종 때 주사를 하였다.


홍재성(洪在成)
字는 운파(雲坡)요 본관은 남양으로서 박사를 하였다.


권중섭(權重燮) 1881~l955
字는 心夫 본관은 안동으로서 府尹 相文의 아들이다. 고종 때 교관을 지냈다.


강래(姜淶)
字는 중수(仲修)이고 호는 우정(佑汀)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역임하였다.


강세영(姜世永)
字는 순필(舜弼)이고 호는 유암(柳庵)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승훈랑(承訓郎) 혜민원 주사를 지냈다.


강필(姜泌) 1878~1942
宇는 달원(達元)이고 호는 의재(宜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중추원의관 용(鎔)의 아들이다. 고종 때 사릉참봉(思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925년 心山 金昌淑의 독립군 자금 모집에 거금(巨金) 2천원을 전한 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대구서에 구금 옥고를 치렀다.


신정생(申鼎生)
宇는 내구(乃九)이고 본관은 평산으로서 주사를 지냈다.


신언거(申彥渠) 1878~l909
字는 해응(海應) 호는 초당(蕉堂) 본관은 평산으로서 고종 때 탁지부기사(度支部技士)로 발탁되어 법학을 공부하여 국가외유고시(國家外留考試)에 합격하였다.


김영대(金榮大)
본관은 강릉으로서 고종 때 의관(議官)을 하였다.


김상호(金相鎬)
본관은 영양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지냈다.


김찬경(金纘經)
字는 우약(禹若) 호는 율암(栗庵) 본관은 경주로서 고종 때 주사를 지냈다.


권중철(權重哲) 1879~l945
字는 성희(聖希) 본관은 안동으로 고종 때 군부주사(軍部主事)를 지냈다.


김시림(金蓍林)
고종 때 주사를 하였다.


금상기(琴相基)
字는 성락(聖洛)이고 호는 석호(石湖)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고종 때 관찰부 주사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써서 石湖大字帖 2권이 있고 금강산유록기(金剛山遊錄記)를 지었다.


강희원(姜禧元)
字는 치복(致福) 호는 백오(白吾)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참봉을 지냈다.


강규원(姜珪元)
字는 원춘(元春) 호는 석당(石塘)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때 참봉을 하였다.


김일영(金馹永) 1870~1923
字는 국경(國莖)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고종 때 관리서(管理署) 주사를 하였다.


김헌식(金憲植)
字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운당(雲塘)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하였다.


김형식(金瀅植)
字는 五一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고종 때 주사를 지냈다.


이원영(李源永) 1884~1951
字는 사현(士賢)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20여세에 신학문에 뜻을 두어 계명사조(啓明思潮)를 받아들였고, 고종 때 주사를 하고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았다. 광복 후 성균관이사를 역임하였다.


이종호(李鍾昊) 1882~l930
字는 원협(元叮)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혜민원 주사를 역임하였다.


이종섭(李鍾燮) 1886~l965
字는 이경(理卿)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동몽교관을 지냈다.


김낙기(金洛基)
字는 주상(周祥)이고 본관은 의성으로 고종 때 참봉을 지냈다.


김효림(金斅林) 1865~l918
字는 학여(學汝)이고 호는 우죽(又竹)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주사를 역임하였다.


김재학(金載學)
字는 이습(而習)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박원희(朴元熙)
字는 경장(敬長)이고 본관은 함양으로서 의관(議官)을 지냈다.


김창한(金昌漢) 1891~l955
字는 여문(汝文)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주사를 하였다.


황명한(黃明漢)
字는 유문(維文)이고 본관은 창원으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권병호(權丙昊) 1879~l948
字는 회중(會仲)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궁내부 주사를 지냈다.


권병근(權丙根)
字는 춘보(春甫)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권래훈(權泰勳) 1889~l958
字는 국보(國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권종원(權宗源) 1871~l929
字는 명언(明彦)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교관을 지냈다.


권종문(權宗汶) 1875~l953
字는 군학(君學)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주사를 지냈다.


권형수(權衡銖) 1847~l919
字는 성중(聖仲)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권상숙(權相淑)
字는 청숙(淸淑)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의관(議官)을 지냈다.


권경수(權景銖) 1856~1942
字는 천서(天瑞)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감찰을 지냈다.


권영한(權寧漢) 1888~1945
字는 찬경(贊卿)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군수를 하였다.


이여정(李如禎)
字는 주보(周甫)요 호는 도곡(道谷)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증 이조참의가 되었다.


강욱원(姜旭元)
字는 범오(範吾)이고 호는 백하(白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승훈랑(承訓郎)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안순기(安謙璉)
字는 찬우(贊禹)이고 호는 계암(桂腐)이며 본관은 순흥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규일(金奎-)
字는 경극(景極)이고 본관은 풍산으로서 통훈대부 혜민원 참서(參書)를 지냈다.


박종원(朴鍾遠)
字는 성원(性元)이고 본관은 밀양으로서 참봉을 지냈다.


권덕진(權德進)

字는 명수(明叟)요 號는 晩圃이다. 본관은 안동으로서 의관(議官)을 지냈다.


신재도(申在道) 1881~?
字는 관일(貫一)이고 호는 괴헌(槐軒)이며 본관은 평산으로서 주사를 하였으며 학행이 있었다. 유고가 전한다.


권중찬(糧重燦) 1876~l950
字는 경안(景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동몽교관을 지냈다.


금기창(琴基昌)
字는 연오(連五)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초(金𤒅)
字는 소명(昭明)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을 하였다.


이흥응(李洪膺)
字는 중모(仲模)이고 호는 경암(敬庵)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감역(監役)을 하였다.


강홍규(姜洪奎)
호는 현파(玄坡)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순조 때 돈영을 지냈다.


금학달(琴學達)
字는 방현(邦賢)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강일(姜鎰) 1861~1925
字는 군일(君一)이고 호는 추당(秋塘) 본관은 진주로서 입재의 후손이다. 중추원의관 통정대부 비서감승을 역임하였다. 경술국치에 격분함을 참지 못하여 귀향하였다. 이시영 등과 결속 임시정부 광복회에서 모금한 많은 지화를 병풍 속에 넣어 가지고 상해로 발송하기 위하여 제물포에서 승선 중 뒤따라온 일병에 발각되어 체포, 구류 7개월간 피나는 고문을 수없이 당했으나 임정 및 광복활동에 대한 내용은 일체 발설치 않았다.


강상기(康祥驥) 조선조
字는 운소(雲巢)이고 호는 수산(繡山)이며 본관은 신천으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강치홍(康致弘) 조선조
字는 인서(仁瑞)이고 호는 송오(松塢)이며 본관은 신천으로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겸 오위 경연참찬관을 역임하였다.


강윤조(姜胤祖) 1568~?
字는 여승(汝承)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음사로 의금부도사와 성현찰방(省峴察訪)을 역임하였다.


강위빙(姜渭聘) 1569-1637
字는 백상(伯尙)이고 호는 서호(西湖) 본관은 진주로서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才行으로 천거되어 희릉(禧陸) 참봉이 되고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냈다. 광해군의 난정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西湖에 은거 중 인조가 등극하자 세자익위사익찬사어(世子翊衛司翊贊司御)를 거쳐 청풍군수로 나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간 봉림대군(효종) 밑에서 군사를 모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향해 꾸짖다가 순국했다. 청풍에 송덕비가 있고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강화오충(江華五忠)으로 충열사에 제향되고 있다. 저서로 혜국지(惠局志)가 있다.


강후(姜 ) 1653~?
字는 차진(次鎭)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좌승지 겸 경염참찬관에 증직되다.


강진(姜 ) 1674~?
字는 계진(季鎭)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다.


강재량(姜再亮) 1711~?
字는 자명(子明)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호조참의가 되다.


강완(姜浣) 1714~?
字는 백이(白以)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조참의를 증직 받았다.


강한(姜瀚) 1719~1798
字는 사적(士積)이고 호는 유천(柳川) 본관은 진주로서 헌릉참봉에 추천되어 세마(洗馬)를 거쳐 가의대부(嘉義大夫 : 정2품)에 이르렀다. 저서로 柳川集이 간행되었고 사덕사(俟德祠)에 제향되었다.


강우(姜 ) 1720~?
字는 숙진(叔鎭)이고 호는 잠계 (潛溪) 본관은 진주로서 좌승지에 증직을 받았다.


강재주(姜再周) 1730~?
字는 위수(滑叟)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강재발(姜再發) 1737~?
字는 자수(子秀)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강책(姜𣽤) 1739~1817
字는 경운(痙雲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강재숙(姜再淑) 1758~?
字는 청보(靑甫)이고 호는 설죽당(雪竹堂) 본관은 진주로서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강봉일(姜奉一) 1776~?
字는 화지(化之)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음사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강필응(姜必應) 1784~l836
字는 시가(時可)이고 호는 만대옹(晩對翁) 본관은 진주로서 증 이조참의가 되었다.


강창(姜漲) 1789~?
字는 대연(大淵)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통정대부 오위장을 하였다.


강덕흠(姜德欽) 1790~?
字는 구일(久一)이고 호는 백운(栢雲)으로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강간(姜柬) 1791~?
字는 직경(直卿)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직 이조참의를 하였다.


강담(姜澹) 1792~?
字는 치옥(致玉)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감역을 하였다.


강록(姜濼) 1792~?
字는 여숙(如叔)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하였다.


강헌(姜瀗) 1795~?
字는 수원(秀源)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강석중(姜錫重) 1796~?
字는 영조(永祚)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음사(蔭仕)로 사과(司果)를 지냈다.


강건일(姜健一) 1804~?
字는 극원(極源)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강교(姜校) 1807~?
字는 색부(嗇富)이고 호는 백좌(白左) 본관은 진주로서 통정대부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강한규(姜漢奎) 1810~1892
字는 한오(漢五)이고 호는 현파(玄坡) 본관은 진주로서 고종 원년(1864)에 학행으로 태릉참봉에 발탁되고 금오랑을 거쳐 음성현감, 돈녕부도정을 역임하고 1889년에는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올랐다.


강복규(姜福奎) 1830~?
字는 치경(致慶)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이조참판이 되었다.


강육(姜錥) 1838~1810
字는 화중(和仲)이고 호는 석하(石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강우영(姜禹永) 1847~?
字는 성백(成百)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충의위(忠義衛) 참봉을 하였다.


강진흠(姜進欽) 1856~?
字는 군선(君先)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음사(蔭仕)로 비서승을 하였다.


강보(姜 ) 1864~?
字는 좌문(左文)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으며 의병중장(義兵中將)을 지냈다.


강재규(姜再奎) 1820~?
字는 서문(庶文)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호조참판이 되었다.


강한(姜漢) 1868~?
字는 유선(幼善)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가선대부 오위장을 하였다.


강순희(姜淳熙) 1872~?
字는 군직(君直)이고 호는 만초(晩樵)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강대중(姜大重) 1868~?
字는 순여(舜汝)이고 호는 송회(松會)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증 이조참의를 하였다.


강환(姜𨨒) 1872~?
字는 진현(進賢)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호조참판이 되었다.


강유환(姜逌煥) 1874~?
字는 중희(仲喜)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강속(姜涑) 1876~?
字는 군칠(君七)이고 호는 석서(石西)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주사 겸 군수서리를 하였다.


강우영(姜友永) 1877~?
字는 경익(敬益)이고 호는 성재(誠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강윤중(姜胤重) 1877~?
字는 자만(子萬)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이조참의를 하였다.


강화(姜禾) 1877~?
字는 치풍(致豊)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이조참의를 하였다.


장두흠(姜斗欽) 1885~?
字는 국형(國衡)이고 호는 담암(澹庵) 본관은 진주로 음사(蔭仕)로서 감역(監役), 비서원승(秘書院承)을 하였다.


강문흠(姜文欽) 1886~?
호는 대용(大用)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강기흠(姜冀欽) 1888~?
字는 치호(致好)이고 호는 덕재(德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강기중(姜岐重) 1890~?
字는 순명(舜命)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음동돈녕(蔭同敦寧)을 지냈다.


강일한(姜日煥) 1893~?
字는 경도(景度)이고 호는 오우재(五友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증 이조참판을 하였다.


강교원(姜敎元) 1894 ~?
字는 이관(而寬)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장릉참봉(莊陵參奉)을 하였다


강주영(姜周永) 1894~?
字는 문옥(文玉)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의금부도사를 하였다.


강효(姜鄗)
字는 백진(伯鎭)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하였다.


강병(姜棅)
字는 명여(明汝)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호조참판을 하였다.


강재걸(姜再杰)
字는 성걸(成傑)이고 호는 청백재(淸白齋)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증 사헌부감찰을 하였다.


강집일(姜集一)
字는 성중(成仲)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호조참의를 하였다.


강필수(姜必秀)
字는 군상(君祥)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좌승지를 하였다.


강준규(姜𨌘奎) 순조 때
字는 만기(萬基)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하였다.


강추(姜鍬) 순조조
字는 득추(得秋)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증 좌부승지를 하였다.


강연중(姜延重) 철종조
字는 설오(雪五)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음사로 충무위부사맹(忠武衛副司猛)을 하였다.


강봉원(姜鳳元) 고종 때
字는 순래(舜來)이고 호는 해운(海雲)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음직으로 비서원승(秘書院丞)과 부사를 역임하였다.


강보창(姜輔昌) 고종 때
字는 위사(渭師)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강란(姜灤)
字는 세현(世顯)이고 호는 만운(晩雲) 본관은 진주로서 주사를 지냈다.


강수창(姜壽昌) 고종 때
字는 응팔(應八)이고 호는 예포(藝圃)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박사(博士)를 지냈다.


강신(姜浱) 고종 때
字는 세진(世振)이고 호는 충재이며 본관은 진주로서 증 호조참판을 하였다.


강우창(姜佑昌)
字는 흥백(興伯)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강유(姜諭)
字는 성춘(聖春)이고 호는 가석(可石)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강지영(姜祉永)
字는 원백(原伯)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지냈다.


강하영(姜夏永)
字는 충오(忠五)이고 호는 난곡(蘭谷) 본관은 진주로서 참봉을 하고 혜민원주서관(惠民院奏書官)을 지냈다.


강학원(姜學元)
字는 초유(初幼)이고 본관은 진주로서 판임관(判任官) 주사를 하였다.


강해(姜海)
字는 일청(一淸)이고 호는 석농(石濃) 본관은 진주로서 음(蔭) 비서감승(秘書監承)을 역임하였다.


곽석좌(郭碩佐) 영조조
字는 대경(大卿)이고 본관은 현풍으로서 호군을 지냈다.


금응기(琴應期) 1564~l640
字는 사정(士挺)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하였고 충순위(忠順衛)로 근무하였다.


금숙기(琴叔己)
본관은 봉화로서 현감을 지냈다.


금순선(琴順先)
字는 여약(汝若) 본관은 봉화로서 승사랑(承仕郎)을 하였다.


금찬규(琴燦奎) 1639~l717
字는 문상(文祥)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진(琴鎭) 1673~1700
字는 사중(士重)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류(琴鏐) 1676~?
字는 사미(士美)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선(琴銑) 1679~?
字는 수경(粹卿)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서현(琴瑞絃) 1855~?
字는 성오(成五)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광무 8년(1904)에 장사랑(將士郎) 교관(敎官)을 하였다.


금봉달(琴鳳達)
字는 군서(君瑞)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인조 때 무공랑(務功郎)을 하였다.


금현석(琴賢錫)
字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명석(琴命錫)
字는 경중(敬仲)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복원(琴福源)
본관은 봉화로서 숙종 때 절충장군(折衛將軍)을 하였다.


금상운(琴尙韻)
字는 해백(諧伯)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봉사(奉事)를 하였다.


금응신(琴應侁) 1526~1610
字는 자진(子振)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였다.


금응림(琴應林) 1527~l610
字는 자성(子聲)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극양(琴克讓)
字는 득지(得之)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嘉善大夫를 하였다.


금응남(琴應南) 1529~l591
字는 자화(子和)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금윤음(琴胤音)
字는 공손(公遜)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호군(護軍)을 하였다.


금봉시(琴鳳時)
字는 사림(士林)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명종 때 호군(護軍)을 하였다.


금시무(琴是武)
字는 경장(最張)이고 본관은 봉화이며 인조 때 호군(護軍)을 하였다.


금자창(琴自昌)
字는 대은(大隱)이고 본관은 봉화이며 숙종 때 호군(護軍)을 하였다.


금우고(琴友古)
字는 목여(穆如)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通訓大夫 掌樂院正을 하였다.


금이순(琴以純)
字는 순여(舜如)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헌종 때 자헌대부(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를 하였다.


금시리(琴是理) 1596~l678
字는 지성(之性)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지냈다.


금성률(琴聲律) 1623~?
字는 영숙(永叔)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제례절목(祭禮節目)을 제정하였으며 종사랑(從仕郎)을 하였다


금순채(琴順彩)
본관은 봉화로서 영조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하였다.


금적(琴籍) 1672~1704
字는 문보(文甫)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영중(琴永重)
본관은 봉화로서 참봉(參奉)을 하였다.


금찬규(琴纘圭) 1854~l908
字는 유서(幼緖)이고 호는 사헌(楒軒)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文筆이 뛰어났으며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금경규(琴絅奎) 1873~?
字는 유상(幼尙)이고 號는 자포(紫圃) 본관은 봉화이다. 소은(素隱) 이의행(李義行)의 문인으로 통덕랑(通德郎), 학문이 넓고 깊었으며 유고(遺槁)가 있다.


김팽로(金彭老) 1517~l576
字는 순보(純甫)이고 본관은 의성으로 묵재 永權의 후이다. 참봉(參奉)을 하였다.


김융(金隆) 1549~1594
字는 도성(道盛)이고 호는 물암(勿庵)이며 본관은 함창으로서 효자 三路公 이음(爾音)의 6세손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문하에서 배우다가 퇴계 이황(李滉) 문하에 들어갔다. 봉화 적덕리에 서당을 지으니 퇴계가 친히 두릉서당(杜稜書堂)이라는 현판을 써주었고 ‘稜’字는 원래 阜方이나 禾자로 쓴 것은 新川을 따서 우계(寓戒)한 것이다. 또한 新川에 대송정(對松亭)을 짓고 저작에 힘쓰고 모재가훈(慕齋家訓) 및 옥조구용(玉藻九容) 등의 첩(帖)을 만들었다.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심상(心喪)을 하였고 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막았으며 소천 노루재 전투에서 창의대장 유종개(柳宗介) 이하 의병들이 전몰하자 충혼을 기리는 만사를 지었다. 1592년에 사림의 천거로 집현전 참봉이 되고 1651년에는 通政大夫承政院 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영주삼봉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잠(金潛) 1578~1632
字는 종원(宗源)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학봉(學峯) 성일(誠一)의 넷째 아들이다. 일천으로 대구교수(大邱敎授)를 지냈다. 광해군의 난정을 피해 법전면 옥천으로 옮겼다.


김시학(金是學) 1600~l629
字는 子正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潛의 맏아들이다 학문과 효도로 이름이 났으며 30세에 세상을 떠나니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호군(副護軍)을 증직 받았다.


김람(金灠) 1601~1677
字는 경청(景淸)이고 호는 水北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南漢山城까지 국왕을 호종하고 노부모를 모시고 太白山에 입산하여 태백오현(太白五賢)과 함께 절의를 지켰다.


김계윤(金繼潤) 1609~l681
字는 여담(汝淡)이고 본관은 의성으로 欽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여경(金餘慶) 1617~?
字는 경숙(景淑)이고 본관은 김해로 예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김추윤(金秋潤) 1628~l681
字는 시달(時達)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부호군을 지냈다.


김계기(金啓基) 1633~l719
字는 덕보(德甫)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호군을 지낸 후 이조참의 증직을 받았다.


김수태(金壽泰) 1638~1710
字는 大來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덕랑(通德郎)을 하였다.


김성후(金聲厚) 1637~1710
字는 덕유(德由)이고 본관은 의성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김수곤(金壽坤) 1641~l706
字는 子厚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김대석(金大錫) 1664~1715
字는 학로(學魯)이고 본관은 김녕(金寧)으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증직을 받았다.


김여탁(金汝鐸) 1658~1726
字는 천위(天爲)이고 호는 초당(草堂)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하였다.


김유선(金有先) 1691~l748
字는 시언(時彦)이고 본관은 金寧으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증직 받았다.


김흥문(金興文) 1691~l771
字는 은백(殷伯)이고 호는 시암(蓍庵)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司成 相夏의 맏아들이며 황파(黃坡)의 후다. 청백리였던 부친의 후광을 입어 음보로 상호군을 제수 받은 뒤 다시 자헌대부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蓍庵集이 있다.


김서응(金瑞應) 1694~l774
字는 응서(應瑞)이고 본관은 풍산으로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서필(金瑞必) 1695~?
字는 흥옹(興翁)이고 호는 구물당(九勿堂)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를 하였다.


김명흠(金明欽) 1696~1773
字는 백해(伯諧)미고 호는 옥계(玉溪)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鶴峯의 후예다. 어버이가 병들자 잉어가 특효하다고 하니 한겨울에 잉어를 구하여 치유하였으며 친상을 당하자 호랑이가 여막 주위를 돌며 호위한 효자로서 감찰직이 추증되었다. 영조 때 정려가 내렸으며 저서로 「옥계집」이 있다.


김해귀(金海貴) 1715~1778
字는 덕삼(德三) 본관은 金寧으로서 학업에 성실하여 문장에 능숙했다. 자헌대부 병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김후기(金厚基) 1717~1776
字는 대재(大載) 본관은 의성으로 학봉의 후예다. 종사랑을 하였다.


김흥광(金興光) 1723~l808
字는 무백(武伯) 본관은 의성으로서 황파의 후예다.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시채(金施采) 1724~1793
字는 빈경(彬卿)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通德郎을 하였다.


김상신(金相信) 1730~1805
字는 오겸(五兼)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계윤(繼潤)의 후예다.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시동(金始東) 1731~l805
字는 계원(啓源)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聲厚의 후예다.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성장(金成章) 1754~l814
字는 성지(聖之)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음보로 병조좌랑(兵曺佐郎)을 하였다.


김성수(金聖秀) 1757~l815
본관은 金寧으로서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하였다.


김재인(金在仁) 1767~l843
字는 승천(承天)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예다.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인수(金寅銖) 1774~?
字는 성춘(聖春)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팔오헌의 후예다. 감역을 지냈다.


김광택(金光澤) 1778~l847
字는 성문(聖文)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永權의 후다. 병조좌랑(兵曺佐郎)을 역임하였다.


김성희(金成熙) 1783~l856
본관은 경주로서 계림파(溪林波)이며 학행이 뛰어나 통정대부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김진휴(金鎭休)
字는 선원(善遠)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시집(金時集) 1801~l886
字는 대여(大如)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潛의 후다. 호군(護軍)을 하였다.


김희손(金熙遜) 1779~l85
字는 치순(穉順)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八吾軒의 후예다. 증 이조참판이다.


김백규(金百圭) 1810~1901
字는 성즐(聖櫛)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영수(金營鍊) 1826~l904
字는 五一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主事를 하였다.


김교원(金敎源) 1827~l895
본관은 경주로서 고종 때 通政大夫 行司憲府 監察 宣略將軍 行龍驤衛 副司果를 지냈다.


김철순(金喆淳) 1830~l905
字는 현길(賢吉)이고 호는 낙하(樂下)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김재헌(金載檍) 1831~1887
字는 백헌(伯憲)이고 호는 황계(黃溪)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도사를 역임하였다.


김복수(金福銖)
字는 무백(武伯)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김창수(金昌銖) 1809~l877
字는 사헌(士憲)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通政大夫를 하였다.


김재학(金載擧) 1855~1928
字는 이습(而習)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진하 1856~1933
字는 청일(淸一)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홍릉참봉(弘陵參奉)을 하였다.


김기제(金箕濟) 1861~l937
字는 재숙(在淑)이고 호는 괴암(槐巖)이며 본관은 경주로서 상촌(桑材) 자수(自粹)의 후예다. 通政大夫 中樞院議官을 하였다.


김성호(金成鎬) 1865~1946
字는 윤집(尹緝)이고 호는 국사(菊史)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음보로 중추원 의관을 하였다.


김병태(金炳泰) 1865~1925
字는 성보(聖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장릉참봉을 하였다.


김헌식(金憲植) 1868~l934
字는太始이고 호는 운당(雲塘)이며 본관은 의성으로서 관리서 주사를 지냈다.


김낙원(金洛源) 1871~l944
字는 聖則이고 호는 경암(耕巖)이다. 관리서 주사를 지냈으며 저서에 경암문집(耕巖文集)이 있다.


김성순(金聖淳) 1874~?
호는 월현(月峴)이고 본관은 김해로서 文愍公 일손(馹孫)의 후예다.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헌락(金憲洛) 1879~?
字는 장수(章叟)이고 호는 졸와(拙寫)이며 본관은 풍산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김창근(金昌根) 1878~1959
字는 회부(晦夫)이고 호는 일초(一草)이다. 본관은 의성으로 관리서 주사를 지냈으며 일초유고(一艸遺稿)를 남겼다.


김충식(金忠植) 1881~l955
字는 형옥(衡玉)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主事를 지냈다.


김시림(金蓄林) 1883~l952
字는 무경(莁卿)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主事를 하였다.


김낙기 (金洛基) 1888~1972
字는 주상(周祥)이고 본관은 의성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추근(金樞根) 1884~l951
字는 성오(星五)이고 호는 북주(北州)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建陵參奉을 하였다.


김규형(金奎炯) 1886~?
字는 경인(景仁)이고 본관은 풍산으로서 通政大夫를 하였다.


김승한(金承漢) 1891~l970
字는 계문(繼文)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주손이다. 내부주사를 역임하였다.


김계흔(金啓昕)
字는 욱경(旭卿)이고 본관은 영양으로서 통덕랑, 天文習讀을 하였다.


김광두(金光斗)
字는 사능(士能)이고 본관은 광산으로 同知中樞府事를 하였다.


김광현(金光鉉)
字는 옥이(玉耳)이고 호는 사와(恩窩)이며 본관은 光山으로서 通政大夫를 하였다.


김동규(金東圭)
본관은 안동으로서 음사로 敎官을 지냈다.


김응호(金應護)
본관은 영양으로서 극행의 5세손이며 양지현감(陽地順監)을 하였다.


김학건(金學騫)
字는 성학(聖學)이고 본관은 영양으로서 내의원습독(內醫院習讀)을 하였다.


김학옹(金學瓮)
본관은 영양으로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역임하였다.


김한벽(金漢碧)
字는 명서(明瑞)이고 본관은 光山으로서 현감을 역임하였다.


김한일(金漢一)
字는 경장(景章)이고 호는 선옹(遷翁)이며 본관은 선성(宣城)으로서 호군(護軍)을 하였다.


김휘용(金輝容)
字는 시회(時晦)이고 본관은 宣城으로 通政大夫를 하였다.


민경달(閔慶達) 1763~1830
字는 군보(君甫)이고 호는 원정(遠汀)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으로서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민우현(閔祐顯) 1784~1848
字는 백우(伯祐)이고 본판은 여흥으로서 慶達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군자감정에 추증되었다.


민치우(閱致雨) 1813~1884
字는 치윤(穉潤)이고 본관은 여흥으로서 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曺參判)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擺府) 부총관(副摠管)을 추증 받았다.


민경호(閱景鎬) 1829~1904
字는 성도(聖道)이고 본관은 여흥이다. 어려서 이미 경서(經書)를 통독하였고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겸 경복궁위장(景福宮衛將)에 추증되었다.


민영하(閭泳夏) 1863~l936
字는 영일(泳一)이고 호는 일재(一齋)이다. 본관은 여흥으로서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通德郎에 천임되었다.


박구(朴球) 1357~1396
字는 경옥(景玉) 호는 둔옹(遷翁) 본관은 영해로서 고려가 망하자 안동지실촌(安東只失村)으로 와서 마을 이름을 기사리(棄仕里)라 하였다. 가선대부 운봉감무(雲峯監務) 겸 권농병마연판관(勸農兵馬鍊判官)을 했다.


박흡(朴治) 1552~1603
字는 희원(希源)이고 호는 석림(石林)이며 본관은 영해로서 參奉을 하고 상산(商山)에 임계회(壬癸會)를 설립하여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박전(朴澱) 1560~1641
字는 희청(希淸)이고 호는 학림(鶴林)이며 기원판관(岐園判官) 球의 후손이다. 봉화현의 훈도를 하였으며 정산서당(鼎山書堂)과 봉죽헌(鳳竹軒)에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박경록(朴景錄) 1609~l679
본관은 무안이며 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박진일(朴震-) 1629~1697
字는 동백(東伯)이고 호는 장암(牆巖)이며 본관은 무안으로서 通德郎을 하였다.


박용수(朴龍秀) 1757~l821
字는 문백(文伯)이고 본관은 무안으로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지냈다.


박익찬(朴翼燦) 1790~1852
字는 경우(景羽)요 본관은 무안으로 通政大夫를 하였다.


박영호(朴榮浩) 1824~l868
字는 화일(華一)이고 본관은 무안으로 通政大夫를 하였다.


박영진(朴永鎭) 1843~1900
字는 화서(華瑞)이고 본관은 영해로서 判官 球의 후손이다. 도사(都事)에 추증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박응천(朴慮天) 1874~l959
字는 사현(士賢)이고 본관은 밀양으로서 만년에 장사랑(將仕郎)에 천임되었고 향리에 퇴우정(退憂亭)을 세워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배천석(裵天錫) 1511~l573
字는 경수(景受)이고 본관은 흥해다. 중종 38년(1545)에 충재 권벌(權橃)의 천거로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선교랑(宣敎郎) 병절교위충좌위부사과(秉節校尉忠佐衛副司果)를 역임하였다. 삼자 삼익(三益)의 귀(貴)로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증직되었다.


배유화(裵幼華) 1611~l673
字는 화은(華隱)이고 호는 팔사헌(八斯軒)이며 본관은 성주로서 판관 상익(尙益)의 아들이다. 음보로 찰방, 주부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팔사집(八斯集)이 있다.


배성철(裵成喆)
字는 성칙(聖則)이고 본관은 흥해로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내고 증직 통정대부를 하였다.


배수일(裵壽一)
字는 오겸(五兼)이고 본관은 흥해로서 호조참의를 하고 통정대부에 증직되었다.


배 준(裵 埈)
字는 준지(峻之)이고 본관은 흥해로서 음사로 참봉을 하였다.


변경회(邊慶會) 1549~1639
字는 군우(君遇)이고 호는 백산(栢山), 본관은 원주로서 생원 永淳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흘, 금윤선과 함께 창의하여 군량이 떨어지매 동생을 시켜 가재를 모두 팔아 군량을 구하여 지원한 공으로 장악원 직장(直長)에 임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화가 이루어지자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의관도 갖추지 않으며 사람들을 대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백 살이라 뒷산에 올라 단을 모으고 자정, 해뜰 때, 해질 때 하루 3번 눈비를 가리지 않고 치성을 드렸다. 지금도 그 단이 남아 있다. 나이 여든에 이르자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龍驪衛副護軍)에 올랐다. 1984년 구양서원(龜陽書院)에 배향되었다.


변극태(邊克泰) 1654~?
字는 여화(汝和)이고 호는 봉은(鳳隱), 본관은 원주로서 栢山의 현손이다. 15세에 7서를 정해(精解)하였으며 18세 되던 해에 강도가 밤중에 침실에 침입하여 단도로 부친을 치려 하자 맨몸으로 달려들어 부친을 구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었으나 부친의 상처가 걱정되어 약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던 중에 흘연히 잠이 드니 비몽사몽 중 신선이 나타나 "횐 떡이 특효하다"고 일러주자 곧 그것을 구하여 부친을 드린 효자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현종임금이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벼슬을 내렸다. 구양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유고가 있다.


손이모(孫以謀) ?
字는 경의(景毅)이고 본관은 일직이다. 음사로 감찰(監寮)을 지냈다.


송익주(宋翼周) 1749~1825
字는 휴징(休徵)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송지헌(宋之憲) 1770~l830
字는 화백(和伯)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공조참의의 증직을 받았다.


송치린(宋致麟) 1790~l830
字는 운서(雲瑞)이고 호는 지와(芝窩)이며 본관은 여산으로서 공조참의의 증직을 받았다.


송이옥(宋鯉玉) 1809~l890
字는 서원(西遠)이고 호는 매수(梅叟)이며 본관은 여산으로서 중추부사 경연관을 지냈다.


송경림(宋慶霖)
본관은 여산으로서 군자견통(軍姿堅通)을 하였다.


송경복(宋慶復)
본관은 여산으로서 덕릉참봉(德陵參奉)을 지냈다.


송경윤(宋慶胤)
字는 광원(光遠)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선무랑(宣務郎)을 하였다.


송계량(宋繼良)
본관은 여산으로서 가선대부를 하였다.


송기(宋璣)
본관은 여산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송대간(宋大桿)
본관은 여산으로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역임하였다.


송묵(宋黙)
字는 내현(來顯)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장릉(章陵) 참봉을 역임하였다.


송웅(宋熊)
字는 위수(渭叟)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장사랑을 하였다.


송원휴(宋元休)
字는 미숙(美淑)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가선대부를 하였다.


송조(宋照)
본관은 여산. 훈도를 역임하였고 좌승지의 증직을 받았다.


송지건(宋之健)
字는 강숙(剛叔)이고 본관은 여산으로서 증직 호조참판을 받았다.


신곤(申坤) 1524~?
字는 후재(厚載)이고 본관은 평산으로서 사복시 주부를 하였다.


신균(申均) 1628~1708
字는 평중(平仲)이고 본관은 평산으로서 호군(護軍) 첨추(僉樞)를 하였다.


신규(申逵)
본관은 平山으로서 사직(司直)을 하였다.


여중부(余仲富)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간의대부(諫議大夫) 선재(善才)의 10세손이다. 고려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하였으며 조선조에 증직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를 받았다. 세월이 오래된 데다가 사적을 잃어버려 고증하기가 어렵다.


여성렬(余成烈)
본관은 의령이고 호판 중부(仲富)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숙천부사(肅川府使)와 안주진병마절도사와 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유인배(柳仁培)
호는 원계(猿溪)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아 증 승지하고 문집이 있다.


이만(李蔓) 조선태조 때~?
字는 성여(成汝)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호분위(虎賁衛) 경력(經歷)을 지냈다.


이인숙(李仁淑) 태종~?
字는 화경(和卿)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음사로 덕천군수(德川郡守)를 지냈다.


이경창(李景昌) 세종 때
字는 경지(景之)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음직으로 군자감주부를 역임하였다.


이봉수(李鳳壽) 1471~l534
字는 인서(仁瑞)이고 호는 팔각정(八角亭)이며 본관은 花山으로 참봉 元叔의 아들이다. 출사하려 할 때 갑자사화가 발생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세상을 등진 채 山水를 벗삼아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나라에서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의 관직은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귀윤(李貴胤) 1493~?
字는 윤지(胤之)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효령대군의 현손이며 관직은 가선대부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 부사정(副司正)으로 기묘사화를 피하여 巨樹村(거수촌 : 현 봉화읍 거촌리)에 살았다.


이준근(李埈根) 성종~?
字는 행중(荇仲)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桃材 秀亨의 아들이다. 음사로 참봉을 하였다.


이당(李棠) 연산 때~?
字는 애중(愛仲)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현감 大根의 아들이다. 음직으로 정략장군(定略將軍)을 하였다,


이효신(李孝信) 1529~1602
字는 계립(季立)이고 본관은 羽溪로서 참봉을 하였다.


이작(李綽) 1532~?
字는 유중(裕中)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귀윤(貴胤)의 아들이다. 가선대부충무위 부사직으로 봉화현감을 지냈으며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이효검(李孝儉) 1522~?
字는 공절(公節)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棠의 아들이다. 음사로 통덕랑을 하였다.


이공(李栱) ?
字는 치중(支中)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호군(護軍)을 하였다.


이효린(李孝麟) 156~1622
字는 원서(源瑞)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桃村 秀亨의 후예다. 朴承任 문하에서 공부하고 임진왜란을 만나 출사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병장 이흥문(李興門) 밑에서 활동한 공으로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에 발령되어 제용감정(濟用監正)을 하였다. 말년에는 수식(水息) 석풍동산 아래서 아양루(峩洋樓)를 지어 학문에 전념하였다.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이찬(李讚) 명종~인조
字는 비승(丕承)이고 호는 율재(栗齋)이며 본관은 우계다. 음보로 예빈시직장을 지냈다. 선조들의 유업을 찾아 옛 터전인 경기도 양주를 수없이 왕래하며 문중의 모든 것을 밝혀 양주선영기행문(楊州先塋記行文)을 재작하였다.


이성기(李成杞)
字는 이간(而幹)이고 호는 구사(九沙)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직장 찬(讚)의 아들이다. 손자의 귀함을 입어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장발(李長發) 1574~l792
字는 영백(榮伯)이고 호는 충효당(忠孝堂)이며 본관은 화산으로서 花山君 용상(龍祥)의 후손이다. 왜란이 일어나자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가 의병을 일으키자 19살의 나이로 문경진중에 달려가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전사하기 전에 시를 읊기를 "백년 사직을 보존하려는 계책으로 6월에 군복을 입었네. 국가를 근심하다 몸은 헛되이 죽으나 어버이 못 잊어 혼백만 홀로 돌아가네" 하였다. 근시재 김해(金垓)는 말하기를 "천성이 순효하고 풍모가 뛰어나 기상이 늠름하다" 하였고 동강 권사온(權士溫)은 큰 그릇이라 하였다. 그 시신을 찾을 때 죽은 모습이 바람을 몰고 우레를 굴리는 듯한 기상이라 하였으며 신야옹(新野翁) 이인행 (李仁行)은 "그 큰 전개를 세운 것은 독실한 학문의 덕과 선조가 가르친 의리를 몸소 실천한 것이라" 하였다. 直長 황소공(黃昭公)이 죽음 앞의 시를 보고 감동하여 "忠孝" 두 글자를 써 붙여 정려를 대신하였으며 감사의 계청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暫參議)에 증직되었다.


이경도(李敬都) 1580~
字는 경이(敬而)이고 본관은 영천으로서 통정대부를 하고 공조참판을 추증 받았다.


이여봉(李汝䭰) 1587~l661
字는 덕훈(德薰)이고 호는 초당(草堂)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경사와 예학에 밝아 학사(鶴沙) 김응조(金鷹祖)와 가례에 관하여 많은 질의응답을 하였다. 학행으로 종사랑(從仕郎)을 하였으며 문집으로는 초당문집 4권 2책이 있다.


이성재(李成材) 1859~1648
字는 자재(子才)이고 호는 서암(西巖)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전적(典籍) 벼슬을 한 여빈(汝馪)의 아들이다. 음사로 선무랑(宣務郎)을 하였으며 유고가 있다.


이예복(李禮福) 선조 때
본관은 우계로서 훈련원 봉사(奉事)를 하였다.


이시겸(李時謙) 1610~1691
字는 익보(益甫)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추만 영기(榮基)의 아들이다. 사림으로부터 추중을 받아 숙종 16년 81세에 통정대부 호군의 벼슬을 받았다. 또한 효성이 깊어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를 하였다.


이함(李涵) 1625~?
字는 양숙(養叔)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학문은 깊었으나 명예와 벼슬은 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인조 때 종친부(宗親府)의 천거로 참봉을 거쳐 충의위(忠義衛) 교위(校尉)를 역임하였다.


이시복(李時復) 1627~l711
字는 자견(子見)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추만 영기의 다섯째 아들이다. 호군(護軍)을 하였고 부인 우계 이씨와 함께 오래 살아 회혼계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이기명(李基命) 1629~l714
字는 정보(定甫)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호군을 추증 받았다.


이성유(李聖兪) 1630~l716
字는 유지(兪之)이고 호는 자연(自然)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호군에 추증되었다.


이기효(李基孝) 1640~l717
字는 행원(行源)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좌승지를 증직 받았다.


이기태(李基泰) 1643~l752
字는 내경(來卿)이고 호는 양치와(養癡窩)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공조참의에 추증되고 유고가 있다.


이기정(李基定) 1647~l726
字는 희천(希天)이고 호는 낙와(樂窩)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용양위 부호군을 증직 받았다. 유고가 있다.


이성정(李成禎) 인조 때
字는 여유(汝由)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훈련원 주부를 지냈다.


이석구(李錫九) 1633~l732
字는 윤서(倫瑞)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증직 받았다.


이기언(李基彦) 1675~l737
본관은 우계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증직 받았다.


이기홍(李基弘) 1678~1726
字는 의경(毅卿)이고 호는 삼사(三思), 본관은 우계로서 영릉참봉(英陵參奉)을 하였다.


이지복(李智福) 1678~?
字는 명부(明夫)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부산진다대포군첨절제사(釜山鎭多大浦軍僉節制使)를 지냈다.


이침(李琛) 1693~?
字는 보(寶)이고 본관은 전주로서 충의위사직(忠義衛司直) 광릉참봉(廣陵參奉)을 하였다.


이도현(李道顯) 1726~1776
字는 치문(穉文)이고 호는 계촌(溪村)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李芝庭의 문인이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왕이 되니 장헌세자의 임오변란(1762)이 있은 지 15년만이었는데 또 유계소찬여사제강(兪棨所簒麗史提綱)의 끝부분에 성조를 거짓으로 핍박한 구절이 있어 사실무근이라고 상소하면서 극형을 당하여도 성조를 위함이요 세자를 위함이니 한이 없다고 서울에 가니, 큰아들 덕원(德元)이 몰래 뒤따라 상경하여 문밖에 엎드렸다가 부자가 함께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124년 뒤 1899년(광무 3년) 도현 부자에 대해 아버지는 가선대부 내부협판(嘉善大夫內部協辦)에 증직하고 아들 덕원에게는 통정대부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내렸다. 계촌집 4책이 전한다.


이문상(李文相)
字는 산수(山叟)이고 호는 태화당(太華堂)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통덕랑을 하고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유고가 있다.


이낙현(李洛鉉) 1810~?
字는 상언(相彦)이고 호는 졸은(拙隱)이며 본관은 영천으로서 절충장군행용양위 부호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이복상(李福相) 1815~l863
字는 기원(基源)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가선대부 중추원의관을 지냈다.


이익상(李翼相) 1816~l903
字는 익승(翼升)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음직으로 감역 (監役)을 하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회상(李會相) 1820~?
字는 덕문(德文)이고 호는 만포(晩圃)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감역을 거쳐 도정(都正)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참판 계로(啓魯)의 귀함으로 증 이조참판이 되고 만포집이 있다.


이헌상(李憲相) ?
字는 경장(景章)이고 호는 술와(述窩)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通德郎을 하였다. 저서로 述窩集이 전한다.


이승로(李承魯) 1838~l901
字는 성석(成錫)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통덕랑을 하였다.


이현규(李鉉珪) 1840~1910
字는 치화(致華)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고종 때 절충장군 용양위 부사과를 역임하였다.


이인화(李寅和) 1846~l909
字는 사극(士極)이고 호는 도천(陶川)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온계(溫溪) 해(瀣)의12대 손이다.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두루 섭렵했으며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시문에 능하여 말을 한즉 그 말이 곧 시라고 하였다. 탁행으로 추천되어 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고 만년에는 고향 원구(院邱)마을의 앞산에 집을 지어 덕산정(德山亨)이라 이름하고 어진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士林치 중망이 높았다. 저서로는 도천집(陶川集) 4책 8권이 전한다.


이정필(李廷弼) 1849~1927
字는 성백(聖百)이고 호는 우산(牛山)이며 본관은 전주로서 유강원(裕康園) 참봉으로 재직 몇 달 만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사직하였다.


이세호(李世鎬) 1855~1932
字는 원경(元京)이고 호는 난정(蘭汀)이며 본관은 진성으로 생원 중찬(中瓚)의 아들이다. 참봉(參奉)을 하였고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자 절의(節義)의 상소를 올렸다.


이윤갑(李潤甲) 1874~?
字는 경흠(敬欽)이고 호는 묵암(黙庵)이며 본관은 우계다. 조부 나일헌(懶逸軒) 오규(五奎)에게 글을 배워 면학에 힘썼다. 학문과 식견이 널리 알려져 승훈랑후도(承訓郎訓導)에 추천되었다.


이교각(李敎珏) 1875~?
字는 원부(元扶)이고 호는 눌은(訥隱)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통덕랑을 하였다.


이병필(李炳弼) 1881~1985
字는 天弼리소 호는 丹泉, 본관은 진성이다. 온계의 13대손으로 천성이 간결하고 엄정해서 선비의 도를 실천하였다. 순종 원년에 교관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주천집 2책 5권이 전한다.


이세기(李世基) 1882~l939
字는 성로(星老)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천품이 간결하고 예학에 밝았다. 혜민원주사(惠民院主事)를 하였다.


이석로(李錫魯) 고종 때
字는 도언(道彦)이고 본관은 진성으로서 통덕랑을 하였다. 그는 수천석지기의 부호로서 1905년에 정회규(鄭會圭), 성익현(成益顯), 변학기(邊鶴基)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모든 독립자금을 책임지면서 적극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경상, 강원, 충청 3도의 의병을 서벽으로 집결시켜 태백준령에 본부를 두고 1908년 5월 왜적이 오는 것을 동리 앞 울창한 느티나무를 방패로 매복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공은 그 많던 재산이 의병활동 자금에 쓰이고 거처마저 없이 되어 만주로 이거하였다.


이가묵(李可黙)
본관은 전주로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광욱(李光郁)
字는 문보(文甫)이고 호는 낙빈당(樂賓堂)이며 본관은 우계로서 에빈시첨정을 하였다.


이교혁(李敎赫)
字는 원재(元在)이고 호는 접산(接山)이며 본관은 진성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이면오(李冕五)
본관은 전주로서 장락원 장례(掌禮)를 추증 받았다.


이승로(李承魯)
본관은 전주로서 참봉을 하였다.


이승우(李承宇)
본관은 전주로서 경릉(敬陵) 참봉을 하였다.


이시겸(李時謙)
본관은 전주로서 호군을 하였다.


이시선(李時善)
본관은 전주로서 호군을 하였다.


이약눌(李若訥)
字는 중민(仲敏)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음사로 참봉을 하였다.


이약성(李若誠)
字는 중성(仲誠)이고 본관은 우계로서 음사로 통례원(通禮院) 별의(別議)를 하였다.


이종연(李鐘淵)
字는 회일(會一)이고 본관은 화산(花山)으로서 음직 주사(主事)를 하였다.


이촉(李㻿)
본관은 전주로서 호군을 하였다.


이치관(李致寬)
본관은 전주로서 이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이치두(李致斗)
본관은 전주로서 내부협판(內部協辦)을 증직 받았다.


이치서(李致緖)
본관은 전주로서 호군을 하였다.


이헌묵(李憲黙)
본관은 전주로서 비서원승에 증직되었다.


임우(林祐) 선조 때
본관은 울진으로서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의주까지 이르렀으므로 훈3등 공신으로 울성군(蔚城君)에 봉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증직되었다.


임예손(林禮孫)
본관은 울진으로서 祐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응순(林應順)
본관은 울진으로서 예손(禮孫)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나가 적을 물리쳐 진흥군(珍興君)에 봉하였다.


전석호(全奭鎬) 1883~?
字는 무경(武京)이고 본관은 옥천으로서 혜민원(惠民院) 주사(主事)를 하였다.


정언섭(鄭彦섭) 1508~?
字는 군언(君彦) 호는 내은(內隱) 본관은 봉화로서 현릉참봉을 제수 받아 수개월 후 귀향하여 양친을 봉양하였으며 한성부에서 봉화로 이거하여 스스로 호를 ‘내은’이라 하고 세상과는 인연을 끊었다.


정유방(鄭維邦) 1652~
字는 군언(君彦)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선무랑(宣務郎)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정일영(鄭日永) 1684~?
字는 우애(于愛)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정재철(鄭載哲) 1686~?
본관은 봉화로서 절충장군을 역임하였다.


정응영(鄭應映) 1715~?
字는 영걸(英傑)이고 본관은 봉화,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을 하였다.


정치로(鄭致魯) 1739~?
字는 사학(士學)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가선대부를 하였다.


정익희(鄭益熙) 1753~?
字는 중협(仲協)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통정대부 절충장군을 하였다.


정명종(鄭命宗) 1762~?
字는 우여(宇汝)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절충장군 중추부사를 하였다.


정필민(鄭必旻) 1840~?
字는 보문(普文)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가선대부 중추부사를 하였다.


정회규(鄭會圭) 1857~l903
字는 문백(文伯)이고 호는 송포(松浦)이다. 본관은 청주로서 물야면 가평리에서 출생하였다. 1896년 의병장으로 추천되었다가 해산된 후 상경하여 이문하(李文河), 심의영(沈宜永), 김운락(金雲洛)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광화문 밖에 경약소(京約所)를 차리고 척양(斥洋) 척왜(斥倭)의 상소를 올렸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겪다가 김대비(金大妃)의 언문하교로 풀려났다. 1901년에 또 환어소(還御疏 : 고종의 환궁을 주창하는 상소)를 올려 윤허 받아 궁내부주사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사은하고 의문 있을 때마다 연명으로 글을 올리니 왕께서 그 글 뜻의 간절함과 필법의 정묘함을 보고 좌우에 이르기를 이 상소문도 정희규가 쓴 것이냐 하였다. 을사조약 후 시사(時事)가 나날이 그릇됨을 보고 의병을 일으켜 해서(海西)지방 연안(延安)에서 싸우다가 잡혀 순국하니 때는 무신년(1908) 11월 25일이었다. 1925년 9월 15일자 한국일보에 그 기사가 실렸으며 1986년 보훈처에서 비를 세웠다.


정건(鄭健)
字는 건서(建瑞)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돈녕부사(敦寧府事)을 역임하였다.


정균(鄭均)
본관은 봉화로서 검교 군기감정 보문각제학 상호군 증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檢校軍器監正 寶文閣堤學 上護軍 贈 奉翊大夫 檢校密直提學)을 하였다.


정담(鄭澹)
본관은봉화로서 참판 도존의 아들이다. 중추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정도존(鄭道存)
본관은 봉화로서 고려조에 총랑(摠郎) 청풍군사(淸風郡事) 직제학(直提學)을 하고 조선조에 와서는 참판을 하였다.


정중규(鄭中圭 : 처음에는 中達)
字는 시중(時仲)이고 호는 가헌(稼軒)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탁(鐸)의 후예다. 고종 때 도사를 역임하였다.


홍응수(洪應守) 1560~l639
字는 수선(守善)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내다가 병자호란 때 돌아왔다. 유고로 실기 1권과 「야은집」이 있다.


홍윤(洪允) 1616~1677
字는 집중(執中)이고 본관은 남양으로서 두곡(杜谷) 우정 (宇定)의 아들이다. 통정대부좌승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홍점부(洪點富) 1721~1784
字는 윤덕(潤德)이고 호는 송은(松隱)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홍운(洪楎) 1723~1764
字는 여형(汝亨)이고 호는 죽계(竹溪)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통훈대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홍술조(洪述祖) 1738~l798
字는 중수(仲修) 본관은 남양으로서 덕성이 인후하고 지조가 고결하였다. 청주(淸州)목사를 역임하였다.


홍재응(洪在應) 1842~l904
字는 명삼(明三)이고 호는 가암(稼菴)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通政大夫 知義禁府事를 지냈다.


홍재덕(洪在德) 1862~l937
字는 도명(道明)이고 호는 신묵당(愼黙堂)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장릉(莊陵) 참봉을 역임하였고 유고가 있다.


홍종용(洪種鑛) 1887~l967
字는 명대(鳴大)이고 호는 청해(晴海)이며 본관은 남양으로서 경릉(景陵) 참봉을 지냈고 유고가 있다.


황순택(黃順澤)
본관은 평해로서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권언신(權彦臣) 1568~l652
字는 미경(美卿)이고 호는 망오재(忘吾齋)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호군(護軍)을 하였다.


권상충(權尙忠) 1593~1643
字는 자하(子夏)이고 호는 월곡(月谷)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증손이다. 집의(執義)에 증직되었다.


권세충(權世忠) 1574~1614
字는 子述이고 호는 운구(雲衢)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尙忠의 아우다 증 장악원정(掌樂院正)을 하였다.


권국(權輂) 1621~1666
字는 행원(行遠)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장사랑에 증직되었다.


권패(權霈) 1637~1676
字는 패연(沛然)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승지에 증직되었다.


권두추(權斗樞) 1639~1681
字는 명경(明卿)이고 호는 고산(孤山)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증 이조참판이 되었다.


권경(權輕) 1641~1722
본관은 안동으로 어모장군(御侮將軍) 전력부위(展力副尉)에 천임되었다.


권희학(標喜學) 1672~l742
字는 문중(文仲)이고 호는 花材, 감고당(感顧堂)이며 본관은 安東으로서 증 가선대부 한성부좌윤(贈 嘉善大夫 漢城府左尹) 명형(命逈)의 아들이다. 7살 때 종숙부 命達에게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났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는데도 항상 大將이 되었고 군율이 엄하였다. 안동부사로 부임한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 후일 영의정)이 공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내직으로 올라갈 때 데려가 자질들과 조금도 차별 없이 거두었다. 崔公에게 兵書, 산법(算法) 九數法, 方田, 속포(栗布), 차분(差分), 少廣, 상공(商工), 균수(均輸) 등을 일일이 배워 통달하였다. 1697년 윤 3월에 明谷이 세자책봉주청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왕은 공을 절충장군, 교련관으로 임명하였다. 숙종 34년(1698)에 팔도에 흉년이 드니 明谷이 해운시랑영사사(海運侍郎迎謝使)로 의주까지 가는 데도 수행하여 쌀 3800석을 인수하였다.
1718년 남해청사로 왜구와 해적을 막고 경종 때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명곡이 세상을 떠나자 가사를 보살피고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였으며 영조 4년(1729)에 이인좌, 정희량이 난을 일으키자 공은 中軍을 거느리고 적을 토평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가의대부(壽義大夫)에 오르고 花原君에 봉해지고 양무공신(揚武功臣)에 녹훈되었으며 두 아들, 세 조카도 양무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공은 청렴 강직하여 곤양(混陽)군수로 재직 시에는 좌의정의 청탁편지를 물리치고 토지 은결 수백 두락을 찾아내었다 그 뒤 영변부사 장연(長洲), 도호부사 해주(海州), 진관병마동첩절제사를 역임하고 안동에 귀향하여 구담리에 감고당을 짓고 明谷의 가사를 돌보고 그의 저서를 간행하였다. 71세에 세상을 떠나자 資憲大夫工曺判書 겸 五衛都摠府都 管에 증직되었다. 공의 영정과 어제시(御製詩)는 영당(影堂)과 어서각(御書閣)에 봉안해 오고 있다. 저서로는 燕行日錄, 南征錄, 감고등문집 등 다수편이 전한다.


권두극(權斗極) 1662~l707
字는 천추(天樞)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호조참판이 되었다.


권혜(權蕙) 1679~1755
字는 수백(樹百)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권총(標蔥) 1680~1740
字는 휴징(休徵)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斗極의 아들이다.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권정모(權正模) 1704~1784
字는 맹범(孟範)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권정린(權正鄰) 1719~1802
字는 응신(應臣)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제수 받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권사문(標思門) 1731~l769
字는 사유(士裕)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권사면(權思勉) 1740~l769
字는 사건(仕健)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권사성(權思聖) 1740~l769
字는 천희(天希)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권정각(權正覺) 1723~l795
字는 성개(聖開)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권정응(權正凝) 1721~1804
字는 정경(鼎卿)이고 호는 흥암(興庵)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권항도(權恒度) 1751~l792
字는 중구(仲久)이고 호는 두은(蠹隱)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이조참판을 하였다.


권사희(權思熙) 1758~1800
字는 사집(士緝)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이조참판을 하였다.


권심도(權心度)
字는 지언(知彦)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증 이조참판을 하였다.


권재원(標載轄) 1782~l860
字는 주로(周老)이고 호는 무구옹(無求翁)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동지중추부사를 하였고 증직 이조참판을 하였다.


권재영(權載永) 1795~l878
字는 효언(孝言)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권한도(權漢度) 1800~1842
字는 여장(汝章)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권정하(權定夏) 1814~l868
字는 우필(禹弼)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감역(監役)을 하였다.


권건(權騝) 1823~?
字는 공건(公建)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동강 사온(士溫)의 후예다. 상호군에 제수되었고 장기현령을 역임하였다.
권연도(權然度) 1824~l912
字는 후지(後知)이고 호는 석암(石巖)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 호군을 하였다.


권재엽(權載燁) 1824~l903
字는 성엽(聖燁)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규하(權規夏) 1826~l903
字는 경곡(景谷)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석하(權錫夏) 1827~?
字는 치문(穉聞)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옥하(權玉夏) 1830~1905
字는 근오(瑾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단하(權端夏) 1832~1903
字는 서오(瑞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옥하의 아우다.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재원(權載瑗) 1832~l908
字는 형옥(衡玉)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하였다.


권재후(權載厚) 1837~l903
字는 성전(聖傳)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병근(權丙根) 1850~l902
字는 춘보(春甫)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권상기(權相璣) 1853~l927
字는 기옥(璣玉)이고 호는 벽오(碧梧)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장하(權璋夏) 1867~l936
字는 사성(士成)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권정공(權正功)
字는 성양(聖養)이고 본관은 안동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권병하(權炳夏) 1871~l909
字는 우석(禹錫)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후룽(厚陵)참봉을 하였다.


권중형(權重亨) 1879~l944
字는 경선(景先)이고 호는 송와(松窩)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권벽수(權銖) 1889~1968
字는 응원(應元)이고 호는 항고(恒皐)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하였으며 시고(詩稿)가 전한다.


권극경(權極經)
字는 자위(自緯)이고 호는 동강(東岡)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를 하였다.


권항(權恒)
字는 명초(明初)이고 호는 고송(孤松)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가선대부를 하였다.


권원도(權元度)
字는 치형(穉亨)이고 호는 송천(松川)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1740년 호군을 하였다.


권동현(權東顯)
본관은 안동으로서 호군을 하였다.


권재로(權在魯)
字는 희현(希賢)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이조참판을 하였다.


김덕영(金德榮) 1866~l938
처음 이름은 達榮이고 字는 子三이며 본관은 함창으로서 三路公 爾音의 18대 주손이다. 통신원(通信院)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김주명(金柱明) 1608~l692
字는 광하(光夏)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后로서 호군(護軍)을 하였다.


김주영(金柱英) 1599~l661
字는 여즙(汝楫)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예다. 증 군자판관(軍資判官)을 하였다.


김주려(金柱麗) 1613~l698
字는 진보(震補)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예로서 호군을 하였다.


김주해(金柱海) 161~l711
字는 경심(景深)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예로서 호군을 하였다.


김경우(金慶遇) 1642~l688
字는 자경(子慶)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증직 군자감정을 하였다.


김지근(金至近) 1651~l710
字는 공진(公進)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苟全의 후이며 증 참판을 하였다.


김지일(金至一) 1646~1716
字는 군집(君集)이고 호는 안분옹(安分翁)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다.
선교랑(宣敎郎)을 하였다.


김지선(金至善) 1649~1730
字는 敬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다. 부호군을 하였다.


김이장(金爾鏱) 1687~1775
字는 기대(器大)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예다.


김천경(金天慶) 1684~1764
字는 명서(明書)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다. 僉知中樞府事를 하였다.


김지경(金至慶) 1669~1728
字는 군적(君積)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언명(金彦明) 1669~1724
字는 언숙(言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증 장례원(掌隸院) 판결사를 하였다.


김이중(金爾鉛) 1694~1776
字는 기언(器言)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同知中樞府事를 하였다.


김이강(金爾鋼) 1684~1771
字는 器也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同知中樞府事를 하였다.


김이일(金爾鎰) 1697~l770
본관은 안동이며 苟全의 후예로서 同知中樞府事를 하였다.


김세흥(金世興) 1690~l749
字는 응시(應時)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증 한성좌윤(漢城左尹)을 하였다.


김경운(金敬運) 1704~l788
字는 德元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증 嘉善大夫行龍驤衛副護軍을 하였다.


김제운(金濟運) 1721~l800
字는 여섭(汝涉)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양택(金養宅) 1726~l787
字는 순조(舜祖)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증 군자감정을 하였다.


김성운(金成運) 1739~l790
字는 내지(來之)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克禮의 후로서 贈承旨를 하였다.


김진찬(金振燦) 1712~l795
字는 大連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증 가선대부를 하였다.


김인택(金仁宅) 1729~l781
字는 和敬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로서 通仕郎을 하였다.


김혁순(金赫淳) 1767~l828
字는 文汝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다. 증 공조참의를 하였다.


김건순(金健淳) 1808~l880
字는 士元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다. 참봉을 하였다.


김세근(金世根) 1843~1865
字는 득명(得明)이고 호는 유천(柳川)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通政을 하였다.


김병춘(金炳春) 1786~1846
字는 성화(聖華)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공조참의를 하였다.


김만택(金萬宅) 1762~1817
字는 聖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참판을 하였다.


김해순(金海淳) 1801~1865
字는 聖哉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工曺參議를 하였다.


김석근(金錫根) 1828~1884
字는 右賢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贈戶曹參判을 하였다.


김병숙(金炳叔) 1803~1865
字는 주여(周與)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通政副護軍을 하였다.


김희근(金羲根) 1803~l865
字는 而極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贈 한성좌윤을 하였다.


김도근(金道根) 1806~l876
字는 而範이고 본판은 안동으로서 通政을 하였다.


김병하(金炳夏) 1855~l905
字는 元基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다.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을 하고 증직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하였다.


김병우(金炳祐) 1883~l969
字는 德彦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증 동지중추부사를 하였다.


김병기(金炳耆) 1889~?
字는 국로(國老)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로 林川郡守를 하였다.


김병진(金炳辰) 1826~l903
字는 而洪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통정을 하였다.


김병호(金炳昊) 1913~l979
字는 덕여(德汝)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克禮의 후이고 음직 敦寧府 都正을 하였다.


김인규(金仁圭) 1883~l953
字는 舜一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홍릉참봉을 하였다.


김점규(金占圭) 1872~1931
字는 균백(均伯)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를 하였다.


김명규(金明圭) 1855~1920
字는 임덕(壬德)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음직 참봉을 하였다.


김용규(金龍圭) 1885~l954
字는 聖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중추원외관을 하였다.


김일규(金日圭) 1885~1926
字는 경안(敬安)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惠民院主事를 하였다.


김용규(金容圭)
字는 舜儀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의금부 도사를 하였다.


김태규(金泰圭)
字는 군삼(君三)이고 본관은 안동이며 贈 通政을 하였다.


김운규(金雲圭)
字는 致景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通政을 하였다.


김대규(金大圭) 1878~l955
字는 성원(聖源)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內部主事를 하였다.


김주진(金注鎭) 1846~1909
字는 君寶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苟全의 후이며 증 嘉善을 하였다.


김옥진(金沃鎭) 1863~l918
字는 君玉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五衛將을 하였다.


김태진(金泰鎭) 1863~l928
字는 君一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다. 通政大夫承政院秘書를 지냈다.


김백진(金伯鎭) 1902~l970
字는 경원(景元)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通政大夫를 하였다.


김해진(金海鎭) 1868~l924
字는 四弼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다. 思陵參奉을 하였다.


김중진(金仲鎭)
字는 中汚이며 본관은 안동으로서 중추원 의관을 하였다.


김용진(金龍鎭)
字는 銀老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후이며 참봉을 하였다.


김기한(金起漢)
字는 충의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 중추원의관을 하였다.


김진동(金晋東)
字는 史吉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통정대부 우부승지를 하였다.


김용한(金龍漢) 康辰~?
字는 士弼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용한(金龍漢) 庚午~乙丑
字는 云京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예이며 참봉을 하였다.


김병륜(金炳倫) 1854~1944
字는 景旭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苟全의 후이며 형조판서를 하였다.


김성순(金聖淳)
호는 月峴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同知中樞를 하였다.


정철순(鄭喆淳) 1824~1886
初諱는 世龍 또는 夏龍이고 字는 승원(承遠)이며 본관은 봉화로서 三峯의 19세손이다. 고종 23년(1886)에 通仕郎行太白山史庫 參奉에 제수되었다.


정호상(鄭鎬相) 1847~l922
字는 기서(璣瑞)이고 본관은 봉화로서 喆淳의 맏아들이다. 의릉참봉(義陵參奉) 판임관 8등에 제수되었다.


권심설(權心說) 1841~?
字는 자명(子命)이요 號는 竹醒이다. 고종 때 수찬경연시독박사(修撰經筵侍讀博士)하다.


권병호(權丙昊) 1836~丙辰
字는 養五이고 起準의 손이다. 議官하다.


권덕진(權德進) 1851~壬申
字는 明叟이고 號는 晩圃이다. 心宅의 子로서 議官하다.


권종대(權宗岱) 1861~甲寅
字는 兄一이고 起準의 孫이다. 參奉하다.


권동진(權東進) 1865~己巳
字는 雲景이고 益和의 孫이다. 參奉하다.


권종우(權宗宇) 1874~戊子
字는 明保이고 丙求의 子이다. 參奉하다.


권성진(權聲進) 1875~
字는 殷 이고 德進의 弟이다. 主事하다.


권기진(權琦進) 1884~癸巳
字는 奇主이고 瑢進의 弟이다. 參奉하다.


김세은(金世殷) ?~l543
字는 殷鄕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克禮의 아들이다. 寧海敎授를 하였다.


김득청(金得淸) 1583~l630
字는 而粹이고 본관은 아동으로 克禮의 현손이다. 교수를 지냈다.


김병정(金炳廷) 1854~1900
字는 賢弼이고 호는 學求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思陵參壽를 하였다.


김윤근(金潤根)
字는 完汝이고 본관은 安東으로서 蔭仕로 군수를 역임하였다.


김병태(金炳台)
字는 聖輔이고 본관은 안동으로서 참봉을 하였다.


김진방(金鎭邦)
본관은 안동으로서 고종 때 逋政을 하였다.


김생명(金生冥)
字는 訥齊이고 관관은 안동으로서 係權의 후예다. 선조 때 진사참봉을 하였다.
봉화문화원님이 2023-02-13 오후 12:10:00 에 작성하신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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