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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인물

봉화문화원게시판
  등록일 : 2023-02-13 | 조회 : 492 | 추천 : 0 [전체 : 13 건] [현재 1 / 1 쪽] [로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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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절 기인(奇人)
제13절 기인(奇人)

                                                         * 봉화군사(2022)의 내용을 따름

임장군(林將軍)
조선 16대 인조 때 사람으로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石乭’이라는 설도 있다. 본관은 울진으로서 울성 부원군 祐右의 후손이다. 그 조부 때 명호 비나리에 살았다고 한다. 장군은 명호면 관창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대 묘소가 여기 있으며 후손 林戶奉 등 6세대가 지키고 있다. 그는 출생하자마자 신체와 언행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으며 10세 때 병서를 읽고 힘이 또한 장사였다. 그는 이웃 풍락산성(신라 때 쌓은 것으로 추정)을 노닐며 전쟁놀이를 즐겼다. 어느 날 이상하게도 용마 한 필이 마을에 나타나자 동민들이 애써 달랬으나 말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임 장군이 달려가 달랬더니 말은 순순히 따랐다. 그는 매일 말을 타고 비나리에서 풍락 산성까지의 길을 닦고 훈련을 쌓아 용맹한 무사가 되었다. 17세 되던 어느 날 부모에게 하직하고 출가하여 안동, 풍산을 다녀 충주지방에 있는 임경업 장군을 찾았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경업 장군을 종군하여 부장과 참모로 활약하다가 호란 후 청나라에 들어간 뒤 종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비나리 사람들은 洞口에 단을 쌓고 느티나무를 심어 매년 정월 보름이며 추모하는 고사를 지내고 있다.


권업(權業) 1689~1755
자는 훈중(勛仲)이고 호는 무위재(無爲齋)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충재의 6대손이다. 어려서 효성이 깊고 우애가 돈독하며 신의가 있었다. 경서는 물론 諸子百家書에 능통하였다. 학문은 이치에 밝고 재주는 가히 대응할 만 하였고 지혜는 앞을 내다보았다. 축지법을 잘하며 물야 西里(가평리)에서 酉谷까지 왕복 40리를 밤마다 다녀갔으며 문을 잠그고 불을 끄고 쥐죽은 듯 있어도 방에 들어와서 모두들 놀라게 했으며 하룻밤에 경주 良洞까지 가서 측백나무를 꺾어 와서 심었는데 살아났다고도 한다. 영조 3년(1727)에 하늘의 기운을 보고 명년에 큰 변괴가 있으리라 하더니 다음해에 이인좌, 정희량의 난이 일어났다. 공은 알고 만석산 고목 속에 숨어 있으면서 자질들에게 상복을 입히고 여막에서 울게 하였던 바 정희량이 보낸 군졸들이 찾아왔다 돌아갔다. 눌은 李光庭은 말하기를 “사람이란 이름이 실상보다 과장되는 일이 많은데 권 아무개는 실상이 이름보다 지나치다.” 하였다. 67세로 세상을 떠나니 공을 아는 字는 모두 눈물을 흘렀다. (영남인물고, 경북위인전)


월연(月蓮)
일명 翠仙이라 하고 號는 雪竹이다. 月蓮은 봉화읍 유곡리 石泉 權來의 侍廳노비로 상전들이 글공부하는 것을 들어 익히고 몰래 자습하여 文章이 숙달하였으며 특히 詩文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당시 선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가 지은 詩를 문인들도 극찬하며 암송하였다. 또한 명산대천을 순방하면서 時流를 즐겼는데, 그의 名詩를 蒼雪 權斗經이 乃城誌에 수록하였고 芝峰類說에도 기재되었다. 그가 남긴 詩 몇 구절이다.
1) 有秋宵怨
洞天如水月蒼蒼하니 木葉簫簫夜有霜이라
十二主曲欄人獨宿에 玉屛容美畵鴛鴦이라
2) 獨 宿
室廉獨宿漫漫하니 風滿危樓白露寒이라
歸鴈一聲驚夢罷하며 起看秋月下欄干이라
3) 新 秋
雨後風凉署氣收하니 井梧庭葉報新秋이라
浮雲散盡天如洗하니 月白淸霽人奇樓하다
4) 石田 成進士, 輅生輓
寂寞西湖鑑草堂에 春諅無生碧桃香이라
靑山何處理豪骨한데 惟有江流不語長이라
당시 경상감사가 月蓮의 기이한 사연을 듣고 그녀를 불러본 뒤, 그를 평(評)하기를 枓聲碧 梅牕月悉香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명의(名醫)
박한진(朴翰鎭) 1815~l893
자는 자원(子遠) 호는 萬里 별호는 五高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몹시 영특하여 한번 배우면 잊지 않았다. 12살 때 부친이 병이 들어 신음하므로 이름난 의원을 두루 찾아 다녔으나 의원마다 병명도 다르고 처방도 각색이어서 병을 고쳤으나 자신도 의술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4서5경, 제자백가, 각종 의서까지 達通하였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병자라도 완쾌시키니 그 수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돈 없는 자는 무료로 치료하고 돈 많은 사람에게도 약 값 외에는 한 푼도 더 받지 않았다. 봉화현감 趙秉益과 張華植의 병을 단 두 침의 탕약으로 고쳤으며 1875년 대비 풍양 조씨(趙대비)가 부창증으로 고생하여 八道의 명의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이 없자 趙秉益, 張華植 두 재상이 공을 추천하여 고종 임금이 將仕郎의 벼슬을 내리고 급히 上京토록 명하였다. 공은 大妃를 배알하고 내일 아침에 화재를 올리겠다 하고 목욕재개하고 정좌하여 숙고 끝에 다음날 아침에 소시호탕(小柴胡湯) 세 첩을 잡수시라고 하자 모두가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첩에 부기가 빠지고 두 첩에 심신이 상쾌하고 세 첩에 다 나으니 왕은 기뻐 소원을 말하라 하여도 모두 사양했다. 왕은 公에게 五高라는 호를 내렸다. 집에 돌아와 萬里亭 五高堂이라는 쌍 현판을 걸어 놓았다.
봉화문화원님이 2023-02-13 오후 12:13:00 에 작성하신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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